아쟁쿠르 전투, 프랑스의 패배
1415년, 오를레앙과 부르고뉴파의 세력 다툼으로 프랑스가 분열된 틈을 타서 영국 국왕인 헨리 5세는 6,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프랑스를 공격했다. 이들의 군사는 1,000명의 보병과 기병 5,000명의 장궁병으로 조직되었다. 이때 프랑스는 군대는 3만 명을 넘는 규모긴 하였지만, 이 전투에서 다시 영국 장궁병들은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통계에 따르면, 프랑스 병사가 돌진할 때마다 영국 장궁병 한 명이 쏘는 화살은 다섯 발이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다섯 번만 쏘아도 5,000명의 장궁병이 쏜 화살은 2만 5,000발이 된다. 아쟁쿠르 전투(1415)에서 프랑스 병사들이 몇 번을 돌진했는지에 대해서는 관련 자료가 없기 때문에 화살의 숫자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후세 사람들에 따르면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에는 화살에 달려 있던 깃털이 눈처럼 쌓였다고 한다.
프랑스인들은 영국 장궁병으로 인한 패배가 뼈에 사무쳤기 때문에, 그들을 잡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반해 승리에 도취한 장궁병들은 의기양양하게 두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렸다. 이는 지금까지도 승리의 표시로 사용되고 있다.
아쟁쿠르 전투에서의 패배로 프랑스군은 7,000명에서 1만 명의 병사가 사망했다. 그중에는 총사령관과 왕실 책임자, 세 명의 공작, 다섯 명의 백작, 그리고 90명의 남작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영국군 측 사상자는 113명이었다고 하는데, 셰익스피어는 희곡에서 사상자 수를 29명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이후 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날은 프랑스에는 재난이었으나, 영국에게는 영광이었다."
헨리 5세는 부르고뉴 공과 결탁하고 프랑스 북부의 영토를 차지했다. 이후 몇 년 동안은 부르고뉴파가 프랑스 왕실을 지배했다. 샤를 6세는 부르고뉴파의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왕비는 샤를 왕세자(후에 샤를 7세)가 왕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고백한다. 더 나아가, 프랑스는 1420년 5월 21일에 트루아에서 왕위 계승권을 상실하는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했다. 트루아 조약의 내용은 헨리 5세가 샤를 6세의 딸 카트린을 왕비로 맞이한 후, 샤를 6세가 사망하면 헨리 자신이 프랑스의 왕권을 계승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샤를 왕세자와 그를 지지하는 아르마냐크파는 이 같은 영국 측의 강요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 전쟁을 벌였다.
1422년에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자, 나이 어린 헨리 6세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국왕을 자칭하고 나섰고, 프랑스에서는 샤를 왕세자가 샤를 7세(1403~1461)로서 프랑스 왕위에 올랐음을 선포했다.
그 당시 프랑스는 양분되어 있었다. 북쪽은 영국이 지지하는 부르고뉴파의 세력하에 있었고, 남쪽은 여전히 샤를 7세가 지배하고 있었다. 1428년, 영국군이 남쪽을 공격하자 프랑스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이때 남쪽 관문인 오를레앙은 프랑스 생사의 관건이 되었다. 따라서 프랑스인들은 오를레앙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위급한 상황일수록 민족의식은 강해지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민족은 가장 눈부신 힘을 발휘한다.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려는 마음이 하나가 되어, 프랑스인들에게 전쟁은 더 이상 영토 분쟁이 아니라 민족해방 전쟁으로 인식되었다. 심지어 영국이 통치하고 있던 루앙 지역에서는 가장 모욕적인 욕이 '영국인 같은 놈'일 정도로 영국에 대한 반감이 극심한 상태였다. 프랑스인들은 앞다투어 전쟁터로 나가 대규모 유격전을 펼쳤다. 당시 다음과 같은 예언이 사람들 사이에 떠돌았다. "한 소녀가 나타나서 프랑스와 샤를 왕을 구할 것이다."
성녀 잔 다르크의 등장
이때 샤를 7세는 오를레앙의 군대를 구하려다 참패를 당해 절망에 빠져 있었다. 신이 아닌 한 이러한 절망에서 프랑스와 샤를 왕을 구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바로 이때 잔 다르크(1412~1431)라는 소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스스로 "프랑스를 구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었다고 말했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 동레미라퓌셀이라는 작은 농촌 마을의 독실한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종교와 애국에 대해서 교육받으며 자랐고, 13세에 프랑스를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1429년 초, 오를레앙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잔 다르크는 즉시 행동을 취했다. 그녀는 먼저 근처 부대로 달려가 지휘관에게 부대원 몇 명을 내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시농에 있던 국왕 샤를 7세를 직접 대면했다. 하지만 샤를의 대신들은 잔 다르크의 능력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그래서 잔 다르크를 시험하기 위해 그녀에게 여러 대신 틈에 있는 국왕을 찾아보게 했다. 잔 다르크는 기지를 발휘하여 샤를 7세를 찾아냈고, 이 일로 대신들의 믿음을 얻게 되었다. 이때 오를레앙의 상황이 더욱 악화하여 한 달 전에 이곳의 포위를 뚫기 위해 지원을 하러 갔던 군대마저 영국군에 전멸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잔 다르크는 자발적으로 군사들을 이끌고 오를레앙으로 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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