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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프랑스

[프랑스]#6 백년전쟁, 프랑스의 영웅 잔 다르크의 최후

by 티제이닷컴 2025.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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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를레앙의 소녀 잔 다르크, 프랑스를 해방하다

 1429년 4월 27일, 궁지에 몰린 샤를 7세는 잔 다르크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말과 갑옷, 투구를 하사했다. 잔 다르크는 '예수 마리아'라고 쓰인 깃발을 들고, 3,000~4,0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오를레앙으로 진군했다.

 잔 다르크는 삼엄한 포위를 뚫고 군량과 무기 등의 물자를 싣고 오를레앙으로 갔다. 그들이 도착하자 그곳에 있던 군인들의 사기가 되살아났다. 잔 다르크는 영국군에 편지를 보내 영국으로 철수할 것을 권하며,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프랑스와 피 흘리는 전투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영국군은 처음부터 고국으로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따라서 잔 다르크는 직접 부대 선두에 서서 돌격을 감행했고, 부상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에 따라 프랑스군 사기는 점점 높아졌다. 그 결과, 프랑스군은 5월 초에 영국군이 차지하고 있던 요새를 점령하고 오를레앙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전투 감각을 되찾았다. 더 이상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전술에 의한 공격을 행했다. 그리하여 파테 전투에서는 영국군 지휘관을 생포할 수 있었으며, 영국군에 투항했던 프랑스 요새도 차례로 돌아왔다. 이렇듯 승기를 잡은 잔 다르크 부대는 파죽지세로 밀고 나가 7월에는 랭스를 공격했다.

 1429년 7월 17일, 샤를 왕은 잔 다르크의 수행을 받으며 마침내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잔 다르크는 전투에 나갈 때 들었던 깃발을 높이 들고 왕 옆에서 호위했다. 이러한 광경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즉 나약한 프랑스 왕세자가 샤를 7세에 정식 즉위했고, 잔 다르크는 프랑스인들로부터 '오를레앙의 소녀'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프랑스인들은 문득 자신들이 영국군에게 승리한 결과, 새로운 왕이 탄생함과 동시에 하나님이 보낸 영웅을 얻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들의 마음에는 영국군에게 빼앗긴 땅을 모두 되찾겠다는 열망으로 가득하였다.

 잔 다르크는 영국군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러나 한편 왕위를 노리고 있던 부르고뉴파 귀족들로부터 반감을 사게 된다. 아울러 샤를 7세 주변 대신들도 슬슬 잔 다르크의 뛰어난 공적을 질투하며 못마땅해하기 시작했다. 샤를조차도 국민들에 대한 잔 다르크의 인기와 영향력에 대한 경계심이 생겼다.


프랑스의 영웅, 잔 다르크의 최후

 영국인들은 잔 다르크가 성녀가 아니라 이교도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1430년 콩피에뉴 전투에서 잔 다르크 부대가 영국군에 패해 성으로 돌아왔을 때, 콩피에뉴에 있던 프랑스군은 그들을 성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이에 따라 잔 다르크는 부르고뉴파에 사로잡혔고, 결국 금화 1만 개에 영국군에 넘겨졌다.

 1431년 5월 30일 오전, 잔 다르크는 루앙 성 광장에서 화형을 당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았다. 그녀의 뼈는 센 강에 뿌려졌다. 잔 다르크의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는 믿었던 자기 사람들의 손에서 비롯되었다. 콩피에뉴 프랑스군이 그녀의 입성을 막아 부르고뉴파에 사로잡혔고, 샤를 7세 역시도 관례에 따라 돈을 들여 충분히 구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격분해 있던 영국인들이 몸값을 지불하고 프랑스인들에게 잔 다르크를 재판하도록 했다. 결국 파리 대학교 신학자들은 그녀를 이교도로 결론짓는다. 잔 다르크의 처형 후 루앙을 되찾은 샤를 7세는 그녀와 관련하여 다시 재판하도록 명했다. 이때는 그녀에게 유죄를 선언했던 사람들도 태도를 바꾸어 그녀의 죽음을 영국인 탓으로 돌렸다.

잔 다르크
잔 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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