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왕위계승 - 백년전쟁의 서막
14세기 프랑스는 수도 파리를 포함하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매력으로 충만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외의 허약함도 지니고 있었다.
그 당시 전 유럽의 관심은 프랑스의 한 궁전에 쏠려 있었다. 그곳에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들이 호화로운 연회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은밀한 밀회를 즐기며 귀부인들과 노닥거리는가 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에서 격렬한 결투를 벌이기도 했다. 결투는 두 사람이 정해진 규칙에 따랐는데, 이것은 이전 시대 기사도 정신의 잔재였다.
당시 보헤이마 존 국왕은 파리를 '세계에서 기사도의 색채가 가장 강한 곳'이라고 칭송하며 계속 이곳에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나 1331년 파리를 방문한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에게는 전혀 낭만적이지 못한 곳이었다. "파리의 실상은 명성만 못하다. 그 명성은 아무래도 이곳 사람들의 선전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런데도 파리가 대도시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아비뇽을 제외하고는 파리보다 더 지저분한 곳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이곳은 학문이 뛰어난 인재들을 포용하고 있어, 마치 온갖 진귀한 보물을 담고 있는 커다란 바구니와 같다. 프랑스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을 표현하기 좋아하고 남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긴다." 또 볼테르의 말을 빌리면, 가장 방종한 시대의 온갖 부패와 가장 우매한 시대의 각종 야만적인 행위들이 모두 이 궁전에서 행해졌다.
14, 15세기 프랑스 왕국은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을 뿐, 사실상 민족국가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국왕의 권력은 농노제의 붕괴에 따라 점점 강화되고 있었지만, 전 국토를 관할할 만한 절대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따라서 국왕은 주로 대봉건 영주들의 영지 소유권에 대한 중재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 시기 프랑스는 로마법의 전통에 따라 사유권 개념이 상당히 발달해 있었다. '나의 봉신의 봉신은 나의 봉신이 아니다.'라는 원칙은 오랜 기간 효력을 유지했다. 봉건 영주들은 국왕에게 권력을 빼앗기는 것을 원치 않았고, 심지어 왕국의 대권을 노리는 이들도 있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에는 내분이 끊이지 않았다.
이 시기 프랑스 일부 영토는 프랑스 국왕이나 봉건 영주의 소유가 아니라, 바다 건너 영국 국왕의 소유였다. 영국의 두 왕조인 노르망디 왕조(1066~1154)와 앙주 왕조(1154~1339)는 프랑스 봉건 영주 출신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에 많은 영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프랑스 역대 국왕들이 영국 국왕의 프랑스 토지 소유권을 박탈하고자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국왕은 프랑스 서남부에 많은 토지를 확보했다. 영국 왕실이 영지를 박탈당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프랑스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1328년, 영국 국왕으로 즉위한 에드워드 3세(1312~1377)는 그의 외삼촌이었던 프랑스 국왕 샤를 4세(1294~1328)가 사망하자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샤를 4세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에드워드는 프랑스 국왕의 생질 자격으로 프랑스 왕권까지 넘보게 된 것이다.
프랑스에 전해오는 '살리카 법전'에서는 성서의 한 부분을 근거로 여성에게 토지 상속권을 부여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다음은 프랑스인들이 이용하는 성서의 해당 구절이다. "백합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느니라." 이는 여자가 백합의 왕국 프랑스를 통치해서는 안 됨을 의미했다. 프랑스가 백합의 왕국인 이유는 부르봉 왕조의 백합 문장이 프랑스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에 관해 더욱 직접적인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프랑스의 왕관은 지극히 고귀한 것이므로, 여자가 이를 쓰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살리카 법전
5세기에 갈리아를 정복한 프랑크족 계통인 잘리어족의 법전이다. 여성이 토지를 상속받을 수 없도록 규정한 장이 포함되어 있어, 여성이 왕위 계승을 못하도록 하는 근거로 인용된다.
이는 곧 프랑스 공주의 아들인 에드워드가 프랑스의 왕관을 쓸 자격이 없다는 뜻이었다. 더욱이 에드워드는 태생적으로 프랑스와 적대적인 국가에서 태어났으므로, 프랑스 삼부회(1302년 필리프 4세에 의해 시작된 신분제 의회로 이후 성직자, 귀족, 평민 대표들로 구성된 국민의회로 정형화됨)는 이를 이유로 영국 국왕의 요구를 거절했다. 결국 샤를 4세의 사촌인 필리프가 왕위를 계승하여 필리프 6세(1293~1350)가 되었다.
유럽 대륙의 두 강대국 간 마찰로 인해 마음을 졸이고 있던 유럽 왕실들은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와 관련하여 혈통을 따르는 프랑스 편에 서야 할지 무력에 기대는 영국 편에 서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여기서 의외의 사실은 온몸을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한 에드워드가 아미앵 대성당에서 필리프 6세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한 일이었다. 사실, 이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못 된다. 영국 국왕은 프랑스 국왕에 종속된 영주의 신분으로, 프랑스 국왕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충성의 맹서가 있었던 직후에 에드워드는 프랑스 국왕과의 왕위 쟁탈전에 돌입했고, 필리프 6세는 그런 에드워드를 대륙 밖으로 철저히 몰아내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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