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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61

[일본 근현대사]#55_국민 소득 배증 계획, 신칸센의 등장과 소비 인식 향상 국민 소득 배증 계획 1950년대 말, 도쿄의 한 식당에서 이케다 하야토와 몇몇 학자들이 정기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은 이케다 하야토의 싱크탱크인 '고치카이'의 주 1회 정기모임이었다. 이케다 하야토는 일본 경제 정책을 주도해 온 주요 경제 관료로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서 대장성을 주관하며 통산상과 경제심의청 장관을 역임했다. 바로 이때, 젊은 경제 전문가인 시모무라 오사무의 주장이 이케다 하야토의 관심을 끈 것이다. 1950년대 중반, 아직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시모무라 오사무는 일본 경제의 두 자릿수 성장을 예측했다. 이케다의 경제 자문인 다무라 빈고는 그를 이케다에게 추천했다. 그러나 공식적인 정부 계획안에 명시할 숫자를 둘러싸고 시모무라와 다무라 사이에 한바탕 설전이 벌어졌다. 시모무라는 11퍼.. 2024. 1. 27.
[일본 근현대사]#54_한국전쟁과 샌프란시스코 조약 자동차 공업도 정부의 특별 지원 대상 산업이었다. 1949년, 미국이 일본을 점령하고 자동차 생산 대수 제한 조치를 폐지했다. 당시 일본의 자동차 생산량은 연간 3만 대에도 못 미쳤다. 그러나 그 후 닛산, 이스즈, 도요타, 히노 등 자동차 생산업체들이 거액을 투자해 외국의 선진기술을 도입해 향후 자동차 제조업의 현대화에 기초를 다진다. 1호기는 수입하고, 2호기 국산으로 일본의 합리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기술 도입 방식이다. 일본은 거의 모든 기계 공업에 훗날 '1호기 수입, 2호기 국산'이라고 불린 방식이 적용되었다. 일본은 이 방식을 통해 국제적인 선진 기술을 최단 시간에 도입하고 개선해 외국 제품과 대등한 수준의 제품을 국내에서 생산해 국제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특히 자동차와 전자산업의 성.. 2024. 1. 27.
[일본 근현대사]#53_한국전쟁 특수로 인한 일본 경제의 도약 일본, 한국전쟁 특수를 톡톡히 누리다 1952년, 일본의 외환 보유고는 3년 전에 비해 5배나 증가했으며, 특수로 인한 수입이 수출로 벌어들인 전체 외화 가운데 63퍼센트를 차지했다. 당시 일본에 '실 사(絲)' 변과 '쇠 금(金)' 변이 이름에 들어간 업종은 무조건 성공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떠돌 정도로 섬유 방직 산업과 금속 산업의 수주량은 전쟁 이전보다 평균 4~5배나 증가했다. 2년 후, 특수 경제에 힘입어 일본의 주요 경제 지표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수준까지 회복되었으며, 이는 전후 경제 회복이 거의 끝나감을 의미한다. 한국전쟁 특수로 인한 소비와 투자 붐은 2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미국 원조와 한국전쟁으로 인한 특수 경제만으론 완전한 경제적 자립을 실현하기에는 여전히 무리인 상황이었다. 1.. 2024. 1. 26.
[일본 근현대사]#52_패전 후, 일본은 어떻게 경제를 회복하였는가? 일본의 전후 개혁은 자산 계급의 정치와 경제 체제를 새롭게 수립했고, 현대적인 변혁의 시발점이 되었다. 일본 경제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신속하게 발전해 세계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는 데 성공했다. 빠르게 회복한 일본 경제 1946년 12월 10일, 도쿄 대학 교수이자 요시다 시게루 내각의 석탄 위원회 위원장인 아리사와 히로미는 '일본 경제의 패국을 살리는 길'이라는 글에서 "기초 원료인 석탄 생산에 모든 경제 정책을 집중해야 한다. 이를 지렛대로 삼아 생활 수준을 향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라고 했다. 당시 일본이 전후에 직면한 위기는 경제 붕괴였다. 실업자가 전체 노동 인구의 20퍼센트인 600만 명에 달했다. 식량 부족으로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심지어는 당시 일본 대기업 경.. 2024. 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