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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240

[영국]#32_크롬웰, 영국의 호국경이 되다 크롬웰 집권하다 10여년간 전쟁을 치르며 새로운 이익집단으로 군대가 급부상하였다. 군대는 편히 앉아 탁상공론만 하는 의회에 대해 반감을 가졌다. 군대의 무력은 대개 그 권력의 기반이 된다. 군대는 자신들이 세금을 정하고 징수해서 고정적인 수입을 갖게 되기를 바랐지만, 곧 의회가 걸림돌이 되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1648년에 크롬웰이 병사들을 보내 자신에게 비협조적인 장로파 의원 140여 명을 의회에서 강제로 축출한 이래 의회에는 고작 90명의 의원만이 남아있었다. 이후에는 50~60명으로 대폭 축소됐다. 의회는 이렇게 몇 차례의 숙청을 거쳐 잔부의회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군대 편에 기울어 있던 크롬웰은 이 '골칫거리' 기구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이미 잔부의회는 '둔부 의회(영어로 '찌.. 2024. 7. 22.
[영국]#31_찰스 1세의 죽음 이후의 영국과 크롬웰 찰스 1세 처형 이후의 영국 찰스 1세의 머리가 땅에 떨어진 후,  한 소년이 그의 머리를 집어 들며 소리쳤다. "보세요! 반역자의 머리예요!" 이 장면을 목격한 어느 성직자는 비통함과 회한으로 가득 찬 글을 남겼다. "소년은 국왕의 존귀한 머리를 마귀의 머리처럼 집어 올렸다. 관중은 미친 듯이 아우성을 질러댔다. 마치 지옥에 온 것 같았다. " 국왕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전 영국에 퍼지자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어쨌든 크롬웰 경이 군대를 장악한 뒤 의회를 압박하여 저지른 국왕 처형 사건은 민심을 잡진 못했다. 로렌스 에카드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일부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른 것은 그들이 끝까지 국왕과 맞섰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국왕의 머리를 높이 쳐들자 군중 .. 2024. 7. 21.
[영국]#30_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 최후의 날 1649년 1월 30일, 영국 국왕 찰스 1세 처형의 날 기록에 따르면 이날은 바람이 가볍게 부는 화창한 날이었다. 수천 명의 런던 시민들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국왕의 처형식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화이트홀 궁전 앞 광장에 운집했다. 광장이 바라다보이는 왕실 연회장의 방 안에서는 찰스 1세가 자신의 삶을 마감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방에는 찰스 스튜어트 혼자 있었다. 그는 자신의 등장을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을 보면서 자신이 군주였던 나날들을 떠올렸다. 따뜻한 겨울 햇살이 고개를 내밀었을 때, 찰스 1세는 아직 어린 두 아들과 눈물의 작별 인사를 마치고 홀로 앉아 기도를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 2024. 7. 20.
[영국]#28_영국내전의 끝, 의회는 승리하고 찰스 1세는 처형당하다 영국 내전, 왕당파 vs 의회파 1642년 8월 22일, 결국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이날 찰스 1세는 노팅엄에서 깃발을 높이 쳐들고, 국왕을 배반하고 모반을 일으킨 의회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소리쳤다. 장장 6년에 걸친 영국 내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왕당파가 승리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곧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철기군'이 등장하면서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의회의 군대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국민에게 호소하며 폭넓은 지지를 확보해 나갔다. 국왕의 지지자들은 모두 영국국교회의 수호자들이었고, 의회의 지지자들은 대부분 청교도였다. 이 전쟁은 흡사 종교전쟁처럼 보였지만 전쟁의 근본 원인은 종교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나라의 최고 권력을 누가 장악하는가의 문제였다. 국왕인가.. 2024. 7.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