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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233

[러시아사]#36_니콜라이 1세의 그릇된 야심과 낙후된 러시아 니콜라이 1세의 그릇된 야심과 낙후되는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의 계승자라 자처하던 니콜라이 1세(재위 1825~1855)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진압하며 자신의 강경 통치에 무척이나 만족했다. 유럽 사회에 변화의 기운이 감도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눈치채지 못했던 니콜라이 1세는 자신을 '유럽의 헌병'으로 칭했다. 엥겔스는 니콜라이 1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는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다. 그의 시야는 끝까지 일개 군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잔인함을 의지의 표현이라 착각했으며 독단적인 집정을 힘의 상징이라 믿었다." 1848년,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났고 이에 따라 제2공화정이 수립됐다. 니콜라이 1세는 마침 궁정 무도회에 참가했다가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 스스로 유럽의 헌병이라 여겼.. 2024. 2. 8.
[러시아사]#35_데카브리스트 실패와 그후 러시아 지식인들의 긍지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뉜 데카브리스트 데카브리스트들은 서유럽 국가 문명에 완전히 부합하는 사회 제도를 실현하려 했다. 그들은 러시아가 매우 낙후되어 있으며 농노제와 군주제가 조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두 가지 방식의 혁명을 제안했다. 온건파는 계몽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서양 제도를 들여와 천천히 농노제와 군주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강경파는 더욱 강력한 방식을 원했다. 그들은 무장 쿠데타로 황제와 황족들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해야만 러시아에 공화국을 세우고 의회를 수립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당시 신하들로부터 데카브리스트들이 농노제를 폐지하고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알렉산드르.. 2024. 2. 6.
[러시아사]#34_데카브리스트와 관련된 몇몇 이야기(데카브리스트 광장과 로맨스) 데카브리스트 광장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유명한 광장이 있다. 참정원 광장이라 불렸던 이곳은 훗날 청동 기사 동상이 세워지면서 표트르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을 데카브리스트 광장이라 부른다. 바로 1825년 황제의 통치를 거부하고 농노 해방을 부르짖었던 데카브리스트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1825년 12월 14일, 데카브리스트 광장에서 울려 퍼졌던 총성과 포성, 그리고 말발굽 소리와 비명은 러시아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이곳에서 1,261명의 혁명 참가자들과 국민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 피가 러시아 땅을 적셨다. 1925년 데카브리스트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이곳을 데카브리스트 광장이라 부르고 있다. 시베리아에서 피어난 데카브리스트의 로맨스 여담 데카브리스트들의 운명은 그렇.. 2024. 2. 6.
[러시아사]#33_데카브리스트의 난, 러시아의 귀족 혁명 시기 전제 군주제와 농노제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다 프랑스혁명의 결과를 직접 목격한 러시아 귀족들은 더 이상 러시아의 현실을 두 눈 뜨고 바라볼 수 없었다. 프랑스의 평민들이 부활한 부르봉 왕조의 귀족들에게 평등과 자유를 요구할 때 러시아의 농노들은 여전히 귀족 지주의 채찍 앞에서 벌벌 떨어야만 했다.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의 불길이 30년 동안이나 지속되고 있었지만, 러시아는 근대적인 공장조차 몇 개 갖추지 못한 채 여전히 수공업으로 생산하고 있었다. 유럽 세계에서 의회제가 보편적으로 인정될 무렵 미국은 이미 대서양 건너편에서 공화국을 수립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군주 독재를 유지하고 있었다. 계몽 군주는 이미 당위성을 잃었고 두 대제의 개방 정책으로 인해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는 진보에 대한 바람이 거세게 .. 2024. 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