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251 [영국]#38_구교냐 신교냐, 제임스 2세냐 윌리엄 3세냐 네덜란드 총독, 윌리엄의 영국행 영국의 의회가 네덜란드의 총독 부부를 국왕으로 초청한 것은 어찌 보면 모험이었다. 위기에 직면했을 때, 영국의 군대가 다시 국왕에게 충성을 바칠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빌럼(윌리엄)의 군대를 가로막을 가능성도 있었다. 당시에는 네덜란드와 프랑스가 서로 등을 돌리던 상황이었다. 이 계획이 실패한다면 모두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어찌 되었든 새로운 국왕을 불러오기 위한 준비는 모두 마친 상태였다. 이제 민심을 얻기 위해 여론을 모아야 했다. 1688년 10월 초순에 영국 각 도시의 번화가, 심지어는 궁벽한 농촌 지역에까지 대량의 선전물과 전단, 벽보가 나돌았다. 국왕의 전제정치를 비판하며 신앙의 자유를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2024. 8. 5. [영국]#37_ 영국의 '명예혁명' 명예혁명이 이루어지기까지 16세기 이후 영국에서 가톨릭은 전제왕권과의 상관관계로 인해 증오의 대상이 되어 갔다. 이런 상황에서 가톨릭교도인 제임스 2세가 영국을 통치한다는 것은 거의 재앙에 가까운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의 통치 방식에 불만을 품었지만, 군주제를 존중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국민들은 국왕을 보위해야 하는데, 그 국왕은 가톨릭을 믿고, 국민들은 그 가톨릭을 증오하는 아주 난감한 상황이었다. 제임스 2세는 즉위 후 3년 동안 가톨릭 편향 정책을 서서히 강화했다. 그러다가 1688년, 그가 로마 교황의 뜻을 받들어 가톨릭 신앙의 자유를 선포하자 영국 국민들은 마침내 국왕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 바로 제임스 2세의 사위였던 네덜란드 총독 빌럼 공에게 초청장을 보내 국왕의 자리를.. 2024. 8. 4. [영국]#36_ 1688년,명예혁명으로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다 제임스 2세는 가톨릭신자였다 제임스 2세는 곧 영국국교회와 사회 각 계층의 저항에 직면했다. 군인들조차 더 이상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제임스 2세가 가톨릭을 부활시키려는 시도는 영국 국민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이미 통치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며, 대다수 영국인은 이 고집 센 늙은이가 하루빨리 죽고 신교도인 그의 딸 메리가 왕위를 이어받기를 염원했다. 국민들은 국왕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무력으로 왕위를 전복시키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합법적인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제임스 2세는 1만 6,000명의 군인을 런던에 주둔시키며 더욱 강력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정세는 급변했고, 1688년의 런던은 1642년에 영국 내전이 시작되던 때처.. 2024. 7. 28. [영국]#35_크롬웰 이후,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가 집권한 영국 찰스 2세의 왕정복고 왕실이 다시 들어선 이후 잉글랜드는 피의 보복으로 인해 공포감이 진동했다. 찰스 1세의 처형을 주도했던 크롬웰 경과 당시 재판장이었던 브래드쇼 경은 국왕 시해죄를 선고받고 부관참시에 처했다. 그들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은 사정없이 베어져 교수대 밑에 다시 매장되었다. 위대했던 호국경도 국왕 찰스 1세처럼 목이 잘려 나갔지만, 사후는 그보다 훨씬 더 끔찍했다. 왕당파는 부패한 시체 두 구에 광기 어린 분노를 쏟아냈다. 그들은 크롬웰의 머리를 찰스 1세가 재판을 받았던 웨스트민스터 홀 꼭대기에 내거는 것으로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마무리 지었다. 과거에 혁명이 고조되면서 수모를 겪었던 의원들은 이제 의회를 거리낌 없이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고귀한 의원들에게는 크롬웰에 대한 .. 2024. 7. 27. 이전 1 ··· 5 6 7 8 9 10 11 ··· 6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