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의 개혁이 군사, 행정, 경제, 기술 분야에 치중했더라면, 예카테리나 2세는 정신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현대 러시아 문학과 예술, 사상의 기초를 닦은 것이다. 예카테리나 2세는 경제만 아니라 사상도 유럽과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당시 유럽은 계몽사상이 유행하고 있었고 초기에는 예카테리나 2세도 계몽사상가인 볼테르를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꼽았다.
예카테리나는 볼테르와 같은 계몽사상가들과 늘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녀는 이들을 경제적으로 아낌없이 지원하였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에는 그녀는 새로운 법률 제정을 위한 법전편찬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이 위원회의 대표에는 농노를 제외한 각 계층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가 제정한 정치와 법률에는 계몽사상이 녹아져 있었으나, 실제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실제로 시행이 됐더라면 분명 변화를 싫어하던 세력들이 예카테리나 2세에게 반대하는 혁명이 일어났을 것이다.
처음엔 예카테리나도 러시아 사회에 계몽사상을 도입하고자 했다. 이는 예카테리나의 행보가 선대 러시아의 차르와는 문명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을 유럽에 보여주고 싶었던 의도가 있었다고 후대에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에 있어 계몽사상은 배부른 소리였단 걸 머지않아 깨닫는다. 프랑스인들이 쓴 책의 내용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지만 러시아에 적용은 할 수 없는 현실적 이유가 있었다. 계몽사상은 러시아의 경제 성장에 밑바탕이 되던 노예제를 부정하고 있던 것이다. 계몽사상가들과 편지도 주고받던 그녀였지만 언제부턴가 계몽사상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감옥에 가두거나 유배를 보내버리기 시작했다.
1765년, 디드로가 자신의 장서를 급히 팔고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즉시 사람을 보내 금화 1만 6,000개를 주고는 그 책들을 디드로가 계속 소유할 것을 명령하였다. 더불어 디드로를 도서관장으로 임용하기도 했다. 무려 50년 치의 월급을 일시불로까지 지불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그녀의 파격적 행동은 유럽을 뒤흔들었다. 유럽 사람들은 예카테리나를 향해 '철학가의 친구'라 칭송했다.
디드로는 곧 여제의 개혁 고문이 됐고, 그의 집은 러시아의 인재 소개소로 변했다. 유럽 각국의 학자 의사, 교사, 장인들이 저마다 디드로의 소개서를 손에 쥐고 러시아를 찾았다. 이들의 러시아 방문은 러시아 문명이 전진하도록 만드는 엔진 역할을 했다.
계몽사상가들은 인간이 본디 선한 존재지만 생활환경에 의해 나쁘게 변하거나 가난해지거나 무식해진다고 인식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의 힘을 빌리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사회 역시 완벽해질 수 있다며 교육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였다.
이런 이유로 예카테리나는 교육에도 당연히 힘을 쏟고, 그녀의 진보적인 정책은 교육 사업에서도 빛을 발했다.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시 정부가 들어서 있으며 1917년에는 10월 혁명의 지휘부 역할을 했던 스몰니 사원은 예카테리나가 세운 여학교였다. 1764년,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 최초의 여성 전문 교육 기관인 스몰니 학원을 설립했는데 학원 부지 선정부터 직원 고용까지 전부 여황제의 손길을 거쳐 이루어졌다. 심지어는 학교의 교칙까지도 직접 제정하였다. 이 학교는 외국어, 음악, 무용, 교양 등이 수업으로 진행됐다.
왜 예카테리나 2세는 여학교를 지은 걸까? 계몽사상에 비추어 보면 교육은 이상적이고 완벽한 시민을 만드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한 국가의 국민을 가장 이상적이고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의 첫 번째 선생님인 어머니의 힘을 기르는 것이 최우선이라 생각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이는 그녀가 실시한 방대한 교육 사업 중에 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그녀는 성과 현에도 중학교와 소학교를 설립해 출신이 미천한 사람들 역시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국민들의 학습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과학원에 입학하면 신분이 노예일지라도 국가의 보호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자유를 주겠노라 공포하기도 했다.
덕분에 예카테리나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 러시아에는 무려 549개의 학교가 세워졌고 학생 수도 6만 2,000명에 달했다. 한편 예카테리나는 더욱 수준 높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유학생들을 유럽으로 보내 더욱 깊이 있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장려했다. 그녀의 이런 정책들이 러시아를 유럽의 반열에 올리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예카테리나에게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 다른 나라의 정치, 생활 형태를 접한 귀족 중 러시아 황제의 전제 정권과 농노제에 반대하는 세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세력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러시아 최초의 지식인'이라 불리는 '라디시체프'였다. 라디시체프는 농노제 폐지를 주장하며 차르 통치 시대를 뒤엎는 대표작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을 출간하여 러시아의 현실을 비판하기도 했다.
유럽으로 유학을 간 귀족들은 수염을 기르지도 않고 프랑스식의 옷을 입고선 프랑스어를 구사하며 유럽풍 집에 살며 유럽의 음식을 먹으며 유럽의 책을 읽었다. 또한 러시아를 타국 대하듯 대하기 일쑤였다. 반면 농민들의 생활은 그들의 1,000년 전 조상과 비교해 볼 때 달라진 게 없었다. 아무렇게나 구레나룻을 기르고 구식 옷을 입고 러시아어를 사용했다. 귀족과 농민이 완전히 다른 민족처럼 돼버렸다. 결국 예카테리나 2세의 러시아 계몽 운동은 두 계층 간의 거리를 더욱 벌어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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