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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20_예카테리나 2세의 경제, 정치개혁

by 티제이닷컴 2023.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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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카테리나 2세는 쿠데타에 성공했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러시아의 파탄 난 경제와 고여버린 공무원들. 그녀가 칼을 뽑았다. 첫 과제는 경제 해결이고, 그다음은 바로 관료 정비였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예카테리나 2세는 냉혹한 현실에 부딪혔다. 당시 러시아의 상황은 참담하였는데, 외국에 주둔하던 주력 부대는 무려 8개월이나 월급을 받지 못해 불만이 쌓일 대로 쌓여있었으며, 해군 함대는 사실상 급료를 포기한 상태였다. 당시 국가 재정은 1,700만 루블 정도가 적자였는데, 더욱 심각한 것은 국고의 수입원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국내의 법 기강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각종 부패 행위가 횡행해 돈만 있으면 법도 쉽게 주무를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극악무도한 대역죄이든 사소한 실수이든 가리지 않고 엄중한 처벌을 받았기에 국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 와중에 공장과 광산, 사원에 속해 있던 농노 20만 명이 폭동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이런 상태인데 국가의 관료 기구가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했다. 한 번은 예카테리나 2세가 근위병 군관 한 명을 모스크바로 보내 뇌물 수수 사건을 조사하려 한 적이 있었다. 모스크바로 가기 위해서는 통행증이 필요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황제로부터 중임을 부여받은 군관이 통행증을 받겠다고 무려 3일 동안이나 이곳저곳을 직접 발품을 팔아야 했다는 것이다. 그 3일 동안 모스크바에 있던 부패 관리들이 모든 증거를 인멸해 버린 것은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예카테리나 2세는 이런 상황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황제가 되자마자 표트르 대제가 환생한 양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사를 돌보기 시작했다. 잠자는 것도, 식사 시간도 신경 쓰지 않으며 여황제는 매일 10시간 넘게 국정에 힘을 쏟았다. 그녀는 처리해야 할 문서가 있다면 9개의 테이블에 이를 모두 펼쳐 놓고 네 명의 비서들에게 돌아가면서 읽도록 한 후 마지막에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여황제는 엄정하고 신속한 정책 집행을 러시아 국정에도 그대로 반영하기 시작했다. 정권을 잡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녀는 국가의 중대사를 연구하는 참정원에 지도 한 장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금까지 변방 도시에 대한 정책은 자세한 상황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주먹구구식으로 결정된 것이다. 심지어 참정원 관료들은 자신들이 논의하는 도시가 백해에 있는지 흑해에 있는지조차 모르니 예카테리나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런 한심한 사실을 접한 예카테리나 2세는 즉시 과학원에 편지를 쓰고는 자신의 사비를 털어 5 루블짜리 지도를 구입했다.

 예카테리나 시대의 대외 개방 정책은 러시아 경제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이전의 제정 러시아가 남겨 놓은 엄청난 양의 외채를 해결하기 위해 예카테리나 2세는 우선 스페인, 포르투갈, 덴마크, 영국, 프랑스와 조약을 맺었다. 그녀는 수출세를 폐지하고 대외 무역을 장려했으며, 질서 있는 경제 발전을 보장해 주었다.

 그녀는 가장 골칫덩이였던 경제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자 했다. 서양의 경제 발전 정책을 도입해 자본주의 공업 발전을 대대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사유재산 보호법을 제정해 공포했으며,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이외 지역의 주민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공장을 세울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러시아에는 수없이 많은 수공업 공장이 즐비하게 되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그 공장들의 합은 무려 1,200개에 달하였다.

 이 같은 안정적인 발전에 힘입은 예카테리나 2세는 집권 2년 만에 1,700만 루블에 달하던 재정 적자를 550만 루블의 흑자 상태로 바꾸어 놓았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 러시아의 재정 수익은 즉위 초기의 2배에 달하는 5,600만 루블까지 늘어났다.

 한편 자신의 권력을 한층 더 강화하고 국가 행정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예카테리나 2세는 국가 통치 체제의 개혁을 단행했다. 1763년 말, 참정원을 여섯 개의 위원회로 나누고 그중 가장 중요한 세 개의 위원회(육군, 해군, 외교)를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다. 참정원의 권력이 커지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검찰관을 두어 이를 감독하기도 했다. 이어서 1768년, 최고 궁정 회의를 설립, 제정 러시아의 자문 역할을 하도록 했다.

 1775년, 예카테리나 2세는 그동안 성, 주, 현으로 나누었던 러시아의 행정 구역을 성과 현 두 개로 축소했다. 이로써 23개의 성은 모두 50개로 늘어났다. 또 황제가 직접 임명한 성장과 두 명의 부성장은 죽을 때까지 황제에게 책임을 다하였다.

 성과 현에는 지방 의회를 설치하고 선거로 행정 관리를 선출하도록 규정했는데 귀족들만이 의원이 될 수 있었다. 성 의회는 상응하는 중앙위원회에 자체적으로 보고를 했으며, 참정원이 이를 감독했다. 또 성의 상위 조직에는 차르가 직접 임명한 총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몇 개 성에 대한 군사권과 행정권을 가졌다. 관리를 직접 선출한 예카테리나는 재능있고 청렴한 인물들을 국가 요직에 앉혔다. 1763년 6월, 영국의 공사 버킹엄은 러시아의 국무대신 보론초프를 통해 상업 조약을 맺고자 했는데 그는 관련 문서를 전달하며 보론초프에게 2,000파운드를 대가로 지불하려 했다. 하지만 보론초프의 대답은 그가 기대했던 답이 아니었다. "나는 수치를 모르는 상인에게 부탁해 나의 여제를 팔 경우 내게 돌아올 이익을 생각해 보겠소. 2,000파운드 또는 20만 파운드를 받는 게 과연 가치가 있는 일인지 말이오."

예카테리나 2세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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