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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17_표트르 개혁의 명암(표트르 대제편 마무리)

by 티제이닷컴 2023.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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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트르는 유럽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 한 것은 아니었다. 유럽에서 유학할 당시 그의 행동만 보더라도 국가 개혁에 대한 그의 태도를 알 수 있다.

 표트르는 영국의 의회를 견학한 적이 있는데, 그 견학 방식은 보통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영국 의회의 출석 요청을 거절했던 표트르는 사실 의회가 어떻게 진행되는지가 궁금했었다. 결국 표트르가 선택한 방식은 창문 밖 지붕에서 회의장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의회의 가장 상석에 앉아 회의를 진행하면서 이따금 천장에 난 창문을 올려다보던 영국 국왕은 어느 날 지붕에서 회의장을 보고 있던 표트르 대제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는 에피소드까지 있다.

 지금으로선 당시 표트르가 지붕 위에 앉아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서양 정치에 대한 이 같은 방관자적 태도는 기술 공부를 향한 그의 열정과는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했다. 이는 유럽의 문명에 대한 그의 태도가 은연중에 드러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후 수많은 러시아 통치자 역시 표트르와 같은 태도를 취하며 유럽의 정치와 문화를 분리해 수용하였다.

 표트르는 결코 맹목적인 유럽 숭배자는 아니었다. 그가 흥미를 보인 것은 유럽의 기술, 문화, 군사였다. 그는 유럽의 지식과 물적 자원을 들여옴으로써 러시아가 유럽에서 독자적인 위치에 서기를 바랐을 뿐, 유럽의 다른 국가가 그대로 러시아로 옮겨 들어오기를 원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 때문에 표트르는 유럽의 민주 정치를 배우지도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러시아의 전제 정치를 더욱 강화하기까지 했다. 러시아의 개혁자가 군주였다는 사실은 개혁을 성공으로 이끈 요인이기도 했지만 개혁을 철저하게 진행하지 못하게 만든 원인이기도 한 것이다.

 표트르는 러시아의 오랜 전제 제도를 절대 군주 제도로 바꾸어놓았다. 그리고 군주 역시 국가의 심부름꾼이자 법률의 대표이며 국가 번영을 수호하는 호위병이라고 강조함으로써 군주의 역할에 현대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정작 표트르는 자신이 국민들의 황제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가 원한 것은 절대적 권력이었다. 이는 그가 남긴 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황제의 권력은 신이 부여한 전제 정권이다."

 절대적인 권력의 도움으로 개혁은 더욱 순조롭게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훗날 한 작가는 표트르의 개혁에 대해 "개혁에 대한 열정과 전제 왕권에 대한 신념은 곧 표트르의 왼손과 오른손과도 같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 손은 다른 한 손의 힘에 눌려 마비되고 말았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 후 러시아의 경제와 문화는 계속해서 발전해 나갔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교착 상태에 빠진 정치 제도는 경제, 문화와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켰다. 표트르 이후의 황제들은 개혁을 통해 사회 갈등을 해소하려고도 했지만 어떤 러시아의 황제도 역사의 최정점에서 더 이상 개혁을 추진해 나가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그들에겐 표트르처럼 시대의 거친 물결을 헤치고 나갈 만큼의 용기가 없었다. 이 때문에 전제 군주 제도는 수백 년 동안 쌓아온 자신만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 버려야 했고,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전제 군주가 끝났음을 알려주었다.

 수 세기 동안의 갈등은 마치 화산 폭발로 분출된 용암처럼 표트르가 심혈을 기울여 이루어놓았던 웅대한 계획들을 모조리 녹여버렸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를 표트르의 잘못으로 돌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표트르의 개혁은 시대적 현실에 기인한 필연적인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시대의 조류에 순응하는 표트르 개혁 덕분에 강국을 향한 러시아의 꿈이 어느 정도 실현되기도 했다.

 이때부터 러시아가 발전을 도모할 때에는 언제나 위로부터의 개혁이 추진되었다. 전쟁에서 패하거나 군주가 자신의 권력에 위협을 느낄 때에도 개혁은 언제나 위로부터 시작됐다. 

 30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표트르는 러시아를 유럽의 일원이 되도록 만드는데 고군분투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유럽을 바라보는 러시아는 이미 예전의 러시아가 아니었다. 러시아의 귀족들은 다른 유럽 국가의 귀족들처럼 프랑스어로 문화와 예술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유럽의 저명한 과학 저서들은 러시아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교육은 러시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업이 됐고, 군사 학원에서 배출된 지휘관은 국가를 지키는 군대를 훈련했다. 이와 같은 국가의 밑거름들이 모두 표트르에 의해 다져진 것이다.

 1721년, 러시아 참정원은 국호를 러시아 제국으로 바꿈과 동시에 표트르에게는 '대제'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추밀원은 표트르를 "러시아를 혼란스럽고 무지했던 암흑시대로부터 빛의 세계로 인도한 러시아 국민의 진정한 지도라"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개방을 위해 적(스웨덴)과 가장 가까운 곳에 수도를 건설한 일은 역사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처럼 자신감 넘치는 행동은 개혁과 개방, 그리고 국가의 발전에 대한 표트르의 확고한 신념을 그대로 보여주었으며, 이와 같은 신념은 2003년에 개최된 상트페테르부르크 탄생 300주년 기념행사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유럽의 변두리에서 유럽의 중심으로 발돋움하는 러시아의 결의를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는 이곳에서 유럽을 배우고 유럽과 교류했으며, 바로 이곳에서 유럽, 더 나아가선 세계에 영향력을 미친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와 표트르 1세에게 있어 영광의 발현이자 개혁의 목표와 증거였으며 강한 러시아의 상징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서쪽 29km 페테르고프에 위치한 여름궁전



 표트르 대제의 개혁이 마무리 편이 되었다. 이렇게 다시 정리하고 보니 우리나라의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많이 생각났다. 둘 다 선진국의 경제, 기술을 흡수하는 데는 최선이었고, 무엇보다 교류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유럽과, 박 전 대통령은 일본과의 무역을 중시했다. 하지만 정치만큼은 절대적 권력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 했다. 물론, 그 점이 앞으로 개혁을 하는데 더 유리할 수도 있어서도 있겠지만 공익적인 건지, 개인적인 건지 당사자가 아닌 우리는 그 진짜 저의를 알 수 없다.

 득이 있으면 실도 있는 법. 빠른 개혁과 경제 성장으로 인해 둘 다 후대의 사회 갈등을 조장하였다. 하지만 배고프면서 살 거냐, 일단 배부르고 다음을 생각할 거냐는 질문으로 접근했을 땐 또 뭐가 답인지 알 수 없다. 어디에 좀 더 중점을 두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표트르 대제 역시 그의 업적 중 어느 포인트에 좀 더 중점을 둘 것이냐로 그에 대한 태도가 정리될 듯하다.

 

다음 회차부터는 표트르 대제의 정신을 잇는 예카테리나 2세 이야기이다.

 

 

[역사학] - [러시아사]#16_'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과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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