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 궁전에는 사자의 주둥이를 찢고 있는 삼손의 형상을 한 매우 특별한 동상이 하나 있다. 이 동상은 표트르가 강력한 해군의 힘을 이용해 스웨덴을 물리치고 네바 강변의 땅을 차지했던 위대한 승리를 표현한 것이다. 그곳을 정복한 일은 러시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이 땅을 손에 넣기 위해 러시아는 수년 동안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그러면서 수많은 패배를 맛보기도 하였는데, 이런 패배는 단념이 아닌 오히려 표트르의 의지를 더 단단히 해주었다. 그러면서 전쟁에 대한 경험치 쌓이면서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지를 배워나갔다. 그는 완전한 승리에 다다를 때까지 몇 번이나 싸움과 패배를 거듭했다.
1700년, 표트르는 북유럽 패권자였던 스웨덴과 나르바 강에서 첫 번째 전투인 나르바 전투를 벌였다. 당시 스웨덴의 국왕이던 칼 12세는 겨우 18세였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관이었다. 나르바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대패를 맛보았다. 현재 에스토니아, 핀란드만 연해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인 나르바는 1581년부터 1704년까지 스웨덴령이었다. 하지만 1700년 대북방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군은 나르바의 요새를 포위했다. 하지만 1700년 11월 3일, 칼 12세의 8,000명 군의 스웨덴군이 러시아군을 공격해 4만 명에 이르는 러시아군을 완전히 격파했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진 것이 없지만, 당시 전쟁이 시작되기 전 표트르는 전장의 최전선에 있지 않았다. 하나의 설로는 러시아가 수적 우세에 있었기에 표트르가 승리를 확신하여 그랬을 것이란 말이 있다. 어찌 됐든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었을 표트르에게 돌아온 것은 스웨덴의 휘장이었다. 휘장에는 대포 옆에 서 있는 표트르가 그려져 있었고 '몸을 녹이고 있는 표트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또 다른 깃발에는 러시아 군대를 이끌고 도망치는 표트르의 모습도 그려져 있었는데, 표트르가 갑옷과 투구를 버리고 하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그림 아래엔 '여지없이 패하고는 통한의 눈물을 흘리네.'라는 글귀가 쓰여있었다.
이 전쟁의 패배는 표트르만의 패배가 아니라 러시아라는 국가의 패배였고, 이런 소식은 유럽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러시아의 명성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르바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는 셀 수도 없었으며, 135개의 대포도 모두 사용 불가가 되었다. 게다가 스웨덴군에게 투항해 버린 많은 외국인 지휘관으로 인해 러시아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러시아의 명성은 떨어졌어도 표트르의 사기를 떨어뜨릴 순 없었다. 오히려 이 패배를 계기로 표트르는 승리에 대한 집착과 투지를 더 불태웠다. 그는 바로 여러 나라를 돌며 국왕들과의 담판을 벌였다. 그 결과 오스만 튀르크는 중립을 약속하였고, 폴란드는 전쟁을 지원해 주겠다는 약속을, 그리고 다른 유럽국들과는 반스웨덴 연맹을 만들겠다는 동의를 얻어냈다. 전쟁에서 외교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전쟁은 패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표트르는 잃은 대포를 다시 만들기 위해 러시아 전역의 교회에서 종을 떼왔다. 그리고 종을 녹여서 300개 이상의 대포를 만들었다. 부족한 병력을 도시와 농촌에서 새로운 병사들을 모집하여 보충하였다. 러시아 전역에서 인구 25명 당 한 명꼴로 평생 군 복무를 할 병사들을 보충함으로써 러시아는 20만 대군의 육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지휘관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표트르는 유럽 전역에 지휘관을 모집하는 전단을 뿌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행보를 걷다 보니 국가 재정이 괜찮을 리 없었다. 바닥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표트르는 화폐 대량 발행이라는 굉장히 리스크가 큰 방법을 동원했다. 1700년 이전엔 러시아는 매년 20만~500만 루블을 발행하였다. 하지만 1700년엔 200만 루블, 1702년엔 450만 루블 이상을 발행하였다. 하지만 화폐의 은 함량을 줄이는 방법을 통해 국고는 금세 채워졌고, 국가의 재정을 메꿀 수는 있었지만, 그만큼 피해는 농민이 감당하여야 했다.
1701년, 다시 한번 표트르는 발트해로 향했다.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러 간 것이 아니었다. 이번엔 나르바 바깥 지역의 요새 먼저 포위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윽고, 스웨덴의 요새는 모두 러시아 군에 점령되었다. 당시 나르바를 지키고 있던 수장 곤은 여전히 표트르를 패배한 지휘관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에서 안일함은 패배로 직결된다. 표트르는 멘시코프의 의견대로 부대원들에게 스웨덴 군복을 입힌 뒤 스웨덴의 지원군으로 위장하도록 명령했다. 속임수에 걸려든 곤은 성을 빠져나와 협공을 펼치려다 결국 러시아군에게 패하고 만다. 이에 따라 나르바는 표트르의 수중에 들어갔고, 곤은 포로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 전쟁을 통해 수중에 넣은 땅 위에 세운 도시가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였으며, 성벽만 초라하게 있던 곳이 이윽고 '북방의 베네치아'가 된다.
1707년 가을, 스웨덴의 칼 12세는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다시 러시아를 공격해 왔다. 이번엔 표트르가 진영의 문을 걸어 잠그고 시간을 벌기로 했다. 1709년, 드디어 표트르가 반격을 시작했다. 결전이 있기 전 직접 말을 타고 러시아를 정탐하러 온 칼 12세는 심각한 상처를 입었고, 실제 전투에서는 앉아서 지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스웨덴은 대패하였다. 패장 칼 12세는 1,000여 명의 생존자와 오스만으로 몸을 피했다. 전쟁은 몇 년 동안 이어지긴 하였으나 칼 12세의 죽음으로 결국 스웨덴은 회복 불능상태가 되어 러시아의 승리로 전쟁은 끝이 난다.
표트르는 스웨덴과의 전쟁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과학을 배우는 학도들은 7년이면 학교를 졸업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세 배에 이르는 기간(1700~1721) 동안 전쟁을 치렀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만큼 결과가 좋으니 신께 감사드릴 따름이다."
드디어 러시아는 유럽으로 향하는 관문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와 같은 일류 국가로부터 제국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역사학 > 러시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러시아사]#17_표트르 개혁의 명암(표트르 대제편 마무리) (0) | 2023.12.01 |
---|---|
[러시아사]#16_'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과 의의 (0) | 2023.12.01 |
[러시아사]#14_세계와바다를 향한 관문: 상트페테르부르크 (0) | 2023.11.27 |
[러시아사]#13_표트르 대제의 러시아 개혁: 두 번째 이야기 (0) | 2023.11.27 |
[러시아사]#12_표트르 대제의 러시아 개혁: 첫 번째 이야기 (0) | 2023.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