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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13_표트르 대제의 러시아 개혁: 두 번째 이야기

by 티제이닷컴 2023.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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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 [러시아사]#12_표트르 대제의 러시아 개혁: 첫 번째 이야기

 

[러시아사]#12_표트르 대제의 러시아 개혁: 첫 번째 이야기

[역사학] - [러시아사]#11_16~18세기 유럽과 러시아의 격차 [러시아사]#11_16~18세기 유럽과 러시아의 격차 앞선 글들에서 언급했듯이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라는 낙후된 국가에서 유럽으로 유학을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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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2년, 표트르는 14등급으로 이루어진 관등표를 제정했다. 혈통이나 출생 신분이 아닌 능력에 따른 승급 제도를 마련했다. 철저한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은 가난한 집안 출신의 인재들에게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됐다. 이 덕분에 모스크바 길거리에서 빵을 팔던 멘시코프는 육군 장교로 승진할 수 있었으며, 공작으로 봉인되기도 했다. 하지만 표트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귀족은 군 복역을 회피하고 있었다. 표트르는 재산을 장자에게만 상속할 수 있는 장자상속령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 하였다. 모든 재산이 장자에게 집중되자 다른 귀족 자제들은 수입이 끊겨 어쩔 수 없이 하급 관리가 되든 공부를 하든, 장사를 하든 돈 벌 수단을 마련해야 했다. 군대에 진심인 표트르는 근위병 중 일병을 마치지 못한 귀족은 군관으로 승진하지 못하도록 규정했으며, 군대에서 7년 이상 복역했거나 관리로 10년 동안 근무한 사람, 또는 15년 동안 상업 활동을 한 사람만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했다.

 서양의 과학 기술에 매료됐던 표트르는 이에 대한 갈망을 행동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한 예로 그는 유럽을 모방하여 1725년 12월 러시아과학원을 설립했다. 매년 2만 5,000 루블에 이르는 과학원의 예산을 직접 짜기도 했으며, 독일과 네덜란드 등지에서 과학자를 데려오기 위해 후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러시아로 건너온 과학자들은 러시아과학원의 초대 연구원들이 됐다. 이때부터 러시아는 과학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그런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표트르는 또한 러시아 최초의 신문까지도 직접 발행하기도 했다. 러시아의 유명한 과학자인 로모노소프는 시를 통해 표트르의 업적을 이렇게 찬양했다. "그래서 각종 신기한 과학이 높은 산과 넓은 바다를 넘어 그 손을 러시아로 내밀었네. 위대한 군주에게 말하노니 나의 온 힘을 다해 순수한 지혜의 새로운 성과를 러시아 인민에게 바칠 것이오!"

 러시아인들은 교육을 통해 문명화될 수 있었으며 과학을 통해서는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 후세의 사람들은 이런 표트르를 다음과 같이 칭송해 마지않았다. "그때 고귀한 영혼과 뛰어난 능력을 지닌 표트르 대제가 나타났다. 그는 한눈에 조국의 병폐를 꿰뚫어 보았으며, 국가라는 단어 속에 녹아 있는 아름답고 성스러운 의미를 깊이 이해했다. 그런 뒤 그는 러시아에 두렵고도 유익한 일격을 가했다. 그는 계급제에, 사욕을 채우기에만 급급해 조국을 잊어버린 귀족들에게, 그리고 수도원 내에서 정신적인 안위만을 추구하며 교회나 인류, 기독교 교단을 깨끗이 잊어버린 수도사들에게 일격을 가했던 것이다. 역사는 그들 중 과연 누구의 편을 들어줄까?"

 표트르의 개혁 정책은 러시아의 모습을 바꾸어놓았다. 개혁을 통해 폐쇄됐던 러시아를 세계 무대로 올려놓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탄생했다.

 개혁이 산업, 관료제, 군대, 교육, 과학, 언론 등 정말 다방면의 영역에서 일어난 걸 보면 표트르라는 군주가 러시아라는 국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면서도, 개혁 전의 러시아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반증해 주기도 한다. 손 볼 곳이 너무 많았다.

 개혁 이전에 프랑스는 이미 절대 군주제를, 영국은 의회 제도를, 스웨덴은 군주 정권을 채택하고 폴란드는 선거를 통해 황제를 뽑고 있었다. 발전 정도가 다르긴 해도 유럽 국가들은 이미 16,7세기부터 자본주의 개념이 태동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단절된 문명을 가진 러시아는 15세기가 되어야 비로소 독립된 중앙 집권 국가가 탄생하였고 농업에 기반한 국가 경제는 유럽 국가에 비해 한참이나 뒤떨어져 있었다. 광활한 토지에 비해 인구가 적어 사람을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 자본주의를 향해 발전할 무렵 러시아는 아직도 봉건주의에 머물러 있었고, 이는 두 문명의 격차를 더욱 극명하게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표트르 집권 이전, 폴란드와 스웨덴 군대가 러시아의 영토를 침범하고 있었다. 그나마 1612년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서며 사회적 불안은 벗어났지만, 당시 러시아의 영토는 분할되어 있었고 바다로 가는 관문 역시 막혀 있었기에 고립된 국가로 남을 수밖에 없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후에 스웨덴, 폴란드와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둬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서부의 분할 지역을 되찾기도 했다. 또한 러시아 내에 많은 공장이 세워지기도 했다. 이처럼 표트르 집권 이전에도 이미 변화의 바람이 있기는 하였으나, 러시아의 국내 상황과 국제적 입지가 바뀐 건 표트르 대제 집권 이후부터인 건 반박의 여지가 없다.

표트르 대제의 러시아과학원을 계승한 오늘날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모습
오늘날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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