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들에서 언급했듯이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라는 낙후된 국가에서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 첫 군주였다. 이 사실 자체가 러시아가 얼마나 뒤떨어져 있었는지를 반증해 준다. 유학을 간 그는 박물관, 대기업 등을 눈으로 관찰하고 조선소에서 가서는 대서양과 인도양을 항해할 수많은 거대하고, 최첨단의 선박들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그들의 쾌적한 생활환경 역시 표트르를 충격에 빠뜨렸다.
믿기 힘들게도, 당시 러시아에서는 음식을 먹을 때 스푼을 사용할 줄도 몰랐다. 거울도 사치품 중의 하나였다. 농민들은 낡고 더러운 집에서 살았는데, 이는 고사하고 천장이 없는 집도 부지기수였다. 일상용품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집이 많았다. 당시 러시아 여성들은 15명에서 20명 정도의 아이를 낳아야 했기에 아주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그러니 서른만 넘겨도 마치 노파처럼 보였다. 문제는 아이들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는 것이다. 20명을 낳아서 두 명만 별 탈 없이 성인으로 자라면 성공한 축에 속했을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에는 대형 공장도 없었다. 몇몇 제련 공장을 제외하면 대부분 작은 규모의 가내 수공업 수준이었다. 이것이 바로 16~18세기 러시아의 모습이었다. 이러니 표트르는 유럽 유학 후 자신의 러시아를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표트르가 본 네덜란드인과 영국인들의 생활은 러시아인들과 비교하면 너무도 풍족해 보였다. 표트르는 공장에서 직접 일을 하면서 유럽이 항해 기술을 이용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을 몸소 느꼈다. 당시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유럽과 무역을 하고 있던 항구는 백해에 위치한 아르한겔스크였다. 하지만 항구란 말이 무색하게도 이 항구 도시는 일 년 중의 3/4에 해당하는 9개월이 얼어붙어 있었다. 즉, 겨우 일 년 중 3개월만 물자를 수송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함선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진 목선이었기 때문에 바렌츠 해 북부 해역은 항해하기엔 너무나도 위험한 지역이었다.
이런 유럽과 러시아의 대비되는 현실은 표트르를 움직이게 만들 수밖에 없는 너무나도 큰 격차였다. 표트르의 유럽 유학은 단지 조선 기술을 배우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들과 동맹을 맺어 힘을 기른 뒤 튀르크 인들에게 함께 맞서려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 그렇게 공공의 적을 가짐으로써 표트르는 러시아가 더 이상 저 멀리, 역사에 쓰이지 않는 일개 변방 국가가 아니라, 놀라움의 연속이었던 유럽의 국가들과 동일 선상에서 그들과 같은 역사의 페이지에 들어가고 싶다 느낀 것은 그리 이상할 게 없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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