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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12_표트르 대제의 러시아 개혁: 첫 번째 이야기

by 티제이닷컴 2023.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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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 [러시아사]#11_16~18세기 유럽과 러시아의 격차

 

[러시아사]#11_16~18세기 유럽과 러시아의 격차

앞선 글들에서 언급했듯이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라는 낙후된 국가에서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 첫 군주였다. 이 사실 자체가 러시아가 얼마나 뒤떨어져 있었는지를 반증해 준다. 유학을 간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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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개혁이 시작됐다. 채찍을 휘두르던 표트르가 늘 야만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유럽을 따라가는 데 진심이었기에 늘 맡은 책임을 다하며 남보다 먼저 모범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는 평생에 걸쳐 포수, 선장, 조선소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을 가지며 기술을 배웠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군주가 아니라 배우는 입장으로서 그의 상사를 존경하며 따랐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매년 큰불이 났었는데 러시아인들은 이를 황제의 영웅적 기개를 나타내는 좋은 징조로 여겼다. 러시아에 주재한 프랑스 대사인 루아르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화재가 발생한 곳에는 늘 표트르가 가장 먼저 왔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화재가 발생한 지역을 떠나지 않았다. 뛰어난 판단 능력으로 그는 어떻게 불을 꺼야 할지를 정확히 지시했다. 만약 그가 지붕으로 올라갔다면 그곳은 화재 현장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표트르의 개혁은 전통에 대한 공격을 의미했다. 그가 잘라버린 것은 러시아의 전통이 고수했던 수염이나 긴 소매뿐 아니라 지난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낙후된 문명이었으며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과 가치관이었다. 그의 개혁은 폐쇄된 러시아에 새로운 양분을 공급하기 위해, 또 러시아인들에게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다.

 그의 강경한 개혁 방식은 효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수공업 공장은 금새 240개 이상으로 늘어났고 관료제 개편 역시 효율성을 보였다. 핵심 자원인 철의 경우에는 1725년을 기점으로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변모했다. 1680년에는 150만 루블 정도였던 국가 수입은 1725년엔 6배에 달하는 900만 루블까지 증가하였다. 군대를 중요시했던 표트르였기에 군대도 꾸준히 키워나갔다. 표트르 집정 말기에 러시아는 20만 명 가까이 되는 병사와 49척의 함대 보유국이 되었다. 고무적인 사실은 대부분의 군인이 외국인이 아니라 러시아인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노력을 통해 변방국이던 러시아의 군사력을 다른 유럽국가들이 신경쓰기 시작했다.

 표트르는 러시아 민족의 수준을 높이는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교육 개혁을 실시하여서 서유럽처럼 수학과 해양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면서 포병을 양성하는 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또한 행정구역마다 기술 학교를 세웠다. 이들 학교에서는 서유럽의 철학, 지리, 역사 방면의 책을 번역해 교재로 썼다. 그렇게 20년 후, 변변한 학교 하나 없던 러시아에는 42개의 기술학교가 세워졌고 학생 수도 2,000명을 넘어섰다. 이들 학교는 군대를 좋아한 표트르답게 군대식으로 운영이 되었다. 퇴역한 장군들에게 학생들을 감독하도록 하였고, 게으름 피우는 학생은 매질을 가하기도 하였다.

 표트르의 집권 시기는 귀족들에겐 매우 힘든 시기였을 수 있다. 그간 공들여 기른 수염을 서구식으로 강제로 깎아야 했으며, 표트르가 규정한 의무 조항은 늘 그들과 대립하였기 때문이다. 귀족 자제들도 예외 없이 15세가 되면 군대에 징집되었으며 스웨덴 군대, 오스만 튀르크의 군대와 싸워야 했다.

 표트르는 교육제도에도 힘을 쏟았는데, 우선 공부를 안 하는 귀족 자제들을 관리하기 위해 의무 교육을 실시하였다. 귀족 자제들의 경우 반드시 수학과 외국어를 마스터해야 했으며, 이를 못 할 경우엔 결혼할 수도 없거니와 귀족 신분을 박탈당할 수도 있었다. 또 공부를 게을리하는 자는 유배를 보내는 극단적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귀족 자제 개개인에게는 괴로운 변화의 바람이었지만, 러시아라는 국가의 입장에선 이런 강경한 수단이 꽤 긍정적 결과를 가져왔다. 각 학교의 학생 수가 안정적으로 증가하였으며, 이에 따라 러시아는 더 많은 쓸만한 인재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의무 교육은 귀족 자제들에게만 국한된 것이었다. 하지만 표트르는 모든 러시아인이 계몽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귀족이 아닌 평민들에게는 박물관과 도서관의 문을 개방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시설들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 주변에는 300년 역사를 지닌 러시아 제일의 박물관과 도서관이 있는데, 오늘날까지도 무료로 시설을 개방하고 있다.

 1719년, 정식으로 문을 연 박물관과 도서관이 모든 이들에게 무료로 개방됐다. 박물관에 가장 처음 전시된 것은 표트르가 유럽을 여행하면서 수집한 신식 물건들이었다. 그 뒤 러시아 전역에 걸쳐 수집한 멸종된 새와 짐승의 뼈, 골동품, 고문학, 인쇄된 책 등이 추가로 전시됐고, 기형적 모습을 가진 눈이 네 개인 양, 다리가 세 개인 아기, 심지어는 표트르 군대를 향해 쏜 스웨덴의 대포알까지도 전시됐다.

 평소 돈을 허투루 쓰지 않던 표트르였지만 박물관과 도서관을 짓는 데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누군가는 입장료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뱉기도 하였지만, 표트르는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이에게 돈을 받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만일 다른 이들을 이끌고 함께 이곳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내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그들에게 커피와 보드카를 대접할 것이다."라며 러시아인들의 이용을 장려하였다.

 실제로 커피와 보드카를 대접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매년 400 루블에 달하는 돈을 개인적으로 지출했다고 한다. 400 루블이면 당시로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표트르가 한 나라의 군주로서 지출한 돈이 연 1,000 루블이 되지 않았다는 걸 고려했을 때, 400 루블의 금액을 사용한 표트르의 진심을 엿볼 수 있다.

 

표트르 대제가 실시한 수염세에 대한 그림
표트르의 개혁으로 수염을 기르려면 수염세를 내야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박물관 Kunstkamera(러시아어 : Кунсткамера). 출처 : 위키피디아

 

-다음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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