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19_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 2세의 쿠데타

by 티제이닷컴 2023. 12. 2.
728x90
반응형

 옐리자베타가 사망하고 러시아의 국왕 자리에 즉위한 표트르 3세는 자신의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예카테리나는 그런 표트르 3세를 보며 걱정하기보다는 기다리고 있었다. 표트르 3세를 대신해 그의 자리를 차지한 본인의 모습을

 러시아에 뜻이 없던 표트르 3세는 그저 기분에 따라 마음대로 국정을 처리해 버리기 일쑤였다. 심지어는 프로이센과 전쟁에서 연일 승리하고 있던 러시아 군대에 갑자기 철수 명령을 내리고는 프로이센의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와 평화 협정을 맺어버리기도 했다. 이러한 행보는 유럽 판도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도 했다. 평화 협정을 맺은 이유는 단순했다. 그저 본인이 프리드리히 2세의 열렬한 추종자이기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서는 직접 부대를 이끌고 나가 프리드리히 2세의 지휘에 따르려 준비하기도 했다. 이 일로 러시아의 군사계가 시끄러워졌고, 오래전부터 같이 프로이센을 견제한 동맹 관계인 프랑스나 오스트리아 등 여러 국가가 표트르 3세에게 극도로 불만을 표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반성하기는커녕 표트르 3세는 러시아 국민들에게 동방정교를 버리고 루터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다. 그는 동방정교 교도들을 이교도라 선포하고 재산을 모두 몰수해 버리는 결정까지 내렸다. 프랑스 외교관이었던 메르히 백작은 편지에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 시절 궁정에서 일어난 혁명은 러시아에 오히려 행운이었다. 특히 동맹국들에 있어서는 더욱 그랬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의 구세주이자 유럽의 구세주였다."

 군사계도 적으로 돌리고, 종교계도 적으로 돌리고, 동맹국과 국민들도 등을 돌렸다. 그런 표트르 3세의 옆에는 바로 줄곧 이런 상황만을 기다려온 예카테리나가 있었다. 1762년 7월 8일 밤, 근위대의 비호 속에서 예카테리나 2세는 쿠데타를 감행했다. 새로운 여황제 예카테리나를 둘러싼 병사들은 앞다투어 그녀의 손등에 키스하였으며, 그녀의 발아래 엎드리기까지 했다. 그녀의 쿠데타는 쿠데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모두의 기쁨과 환호 속에서 여제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예카테리나 만세! 우리의 어머니 예카테리나 만세!"를 외치는 러시아 국민들의 환호는 끊이지 않았다.

 궁정의 귀족들과 각국의 사절단, 그리고 종교계 인사들 역시도 새로운 여황제의 탄생을 축하했다. 7월 18일, 추밀원은 예카테리나 2세를 정식으로 러시아의 차르(동방 정교회를 믿는 남슬라브족 및 동슬라브족 문화권의 군주 칭호)로 선포했다.

 그리고 그날 표트르 3세의 갑작스러운 죽음 소식이 전해졌다. 왕위에 오르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세상을 뜬 것이다. 표트르 3세의 도움을 받았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표트르 3세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표트르는 마치 단잠에서 억지로 깨어난 아이와 같았다. 그리고 그는 너무도 간단하게 황위에서 제거되고 말았다."

  그 당시 유럽은 7년 전쟁(1756년~1763년)을 치르고 있었다. 슐레지엔 영유를 둘러싸고 유럽 대국들이 둘로 갈라져 싸운 전쟁으로, 세계적으로 보면 7년 전쟁은 해외 식민지를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오랜 싸움의 일환이었으며, 이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대식민 제국의 지위를 확립하게 된다.

 날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표트르 3세가 즉위한 1762년은 7년 전쟁의 거의 끝물이었다. 이 전쟁은 유럽 본토에서도 일어났지만 대서양 건너 캐나다와 미국이 있는 아메리카 대륙에서까지 이어진 상당한 규모의 전쟁이었다. 이러한 전쟁에 러시아도 참여했었다. 하지만 옐리자베타가 죽고 표트르 3세가 전쟁을 포기해 버리는 바람에 러시아는 전쟁에서 승리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러시아 사회에는 이러한 표트르에 대한 불만이 팽배할 수밖에 없었다. 표트르 대제의 손자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표트르 3세는 러시아에 대해 너무 문외한이었다. 

 그래도 표트르 3세는 1년도 안 되는 재위 동안 러시아의 발전에 있어 꽤 중요한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귀족에게 부여됐던 부역의 의무를 폐지해 버린 것이다. 이 덕분에 귀족들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얻게 됐다. 절대적 자유를 얻은 귀족은 정부를 위해 부역을 계속할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원한다면 국외로 이민을 갈 수도 있었다. 외국에서 병역을 마치더라도 승진을 할 수 있었으며, 러시아로 돌아오면 그 계급이 유지되기도 했다.

 예카테리나 2세 역시 이 정책만큼은 그대로 고수했다. 당시 러시아 사회는 그녀에게 무한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독일인이었던 예카테리나는 어느 정도 이방인의 억양이 나오긴 했지만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러시아인들보다 더 깊이 러시아를 이해하고 사랑했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언제나 러시아의 국익을 우선으로 세상을 바라봤으며, 국익을 어떻게 하면 증진할 수 있는지 그 방법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역사학] - [러시아사]#외전_표트르와 청동기사

 

[러시아사]#외전_표트르와 청동기사

[역사학] - [러시아사]#10_표트르의 아픈 손가락인 아들 '알렉세이' [러시아사]#10_표트르의 아픈 손가락인 아들 '알렉세이' 앞선 글에서 말했듯, 표트르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주저함이 없는 인

readmyworld.tistory.com


 앞서 포스팅했던 청동 기사 동상의 주춧돌에는 예카테리나 2세가 표트르에게 바치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 글로 그녀는 본인이 표트르 대제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예카테리나 2세가 이렇게나 후계자임을 자처하는 이유는 러시아 황제 자리에 대한 타당성을 얻기 위함이었을 거라 추측한다. 어쨌든 쿠데타로 정권을 차지하였기에 그녀 자체엔 러시아 황제에 대한 정통성은 미약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확실히 많은 분야에서 표트르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 나갔다. 예카테리나 2세는 다른 차르들보다 훨씬 긴 34년 6개월이란 기간 동안 황제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러시아를 통치하였다. 본격적으로 예카테리나 2세의 행보를 파헤쳐보자

표트르 3세의 초상화
표트르 대제의 손자이자 예카테리나 2세의 남편인 표트르 3세

[역사학] - [러시아사]#18_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의 등장

 

[러시아사]#18_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의 등장

1762년, 또 한 명의 여제가 우스펜스키 사원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이로써 표트르의 개혁은 마침내 충실한 계승자를 만나 계속 이어질 수 있었으며, 러시아 역시 다시금 발전 궤도에 오를 수 있었

readmyworld.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