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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21_예카테리나 개혁과 그 한계점

by 티제이닷컴 2023.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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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카테리나 2세는 당시 러시아 사람들에게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당대 미녀들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출중한 미모를 자랑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고대 오리엔트의 전설적인 여제 '세미라미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예카테리나는 참정원, 총감, 성장들을 통해 러시아 제국 전체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녀의 독재 정권은 나날이 강해져 갔고 관료제 역시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전보다 확실히 발전해 갔다. 이렇게 예카테리나는 홀몸으로 타국에 와서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다져나갔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했다면 예카테리나는 오늘날만큼의 명성과 존경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정신적으로도 러시아 전체를 장악하고 싶었던 그녀였기에 이제는 러시아의 귀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1763년, 그녀로 인해 러시아의 귀족들은 표트르 시절 축소되었던 본인들의 입지를 다시금 회복할 수 있었다. 귀족의 권리를 줄이고 의무를 강화한 표트르 대제와는 상반되게 귀족의 환심을 사야 했던 예카테리나는 귀족들의 권리를 인정했으며, 귀족들에게 술을 담글 수 있는 양조권을 허락하기도 했다. 또 병역의 의무를 다한 귀족은 군관의 신분을 얻을 수 있도록 했다. 귀족들에게 평민을 능가하는 가시적인 특권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1785년 4월 21일, 예카테리나는 '러시아 귀족의 권리와 자유 및 특권에 관한 조령'을 공포하고 귀족들에게 토지, 농노, 광산, 삼림 등을 소유할 수 있도록 했으며, 도시에서 토지나 건물을 매매하고 공장을 짓는 데 투자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주는 흡사 유럽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또한 귀족이 러시아의 특권 계층임을 법률상에 명시하면서 그들은 국가에 대해 어떠한 의무도 지지 않으며 반역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법률상의 제한이나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약속하였다. 여황제의 이러한 배려에 귀족들은 당연히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으며, 그녀를 찬양하기 시작한다. 러시아의 귀족들은 예카테리나 2세를 '귀족 여제'라고 부르며 지지했다

 같은 날, 그녀는 '러시아 제국의 도시 권리와 권익에 관한 조령'도 발표했다. 그녀는 이 법령을 통해서 도시에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 법령에 의하면 500루블 이상을 보유한 상인은 신체적인 처벌을 받지 않고, 병역에서도 해방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수입의 1퍼센트를 자본세로 납부하면 가족 수에 따라 일률적으로 내던 인두세에 대한 면제 혜택까지 누릴 수 있었다. 러시아의 상업계는 예카테리나의 이러한 정책을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그녀는 18세기에는 신흥 공업의 발전이 러시아의 국력, 특히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도 잘 알고 있었다. 군사력을 통해서 서유럽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었고 국제무대에서 러시아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다는 사실 역시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처럼 예카테리나 2세는 억제와 회유라는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공고하게 다져나갔다. 이제 귀족과 신흥 자본 계급 모두가 여황제를 자신들의 대변인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예카테리나는 사회의 풍속을 더 부드럽게 바꾸어 놓기도 했다. 러시아 사회는 더욱더 진보적이고 인도주의적이며 교양 있게, 그리고 안정적으로 바뀌어 나갔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인데, 이에 따라 그녀가 시행한 개혁의 내용들이 더욱 풍부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 개혁은 중고등 교육 제도를 낳았으며 외국 문학 작품들의 번역 작업도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또 많은 러시아인이 유럽 문학의 대가로 부상하기까지 했다.

 또 러시아 국내를 새로운 행정 구역, 즉 성으로 나누었다. 오늘날 러시아의 행정 구역 개념이 바로 예카테리나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녀는 정부의 직권도 세분화시켰다. 이러한 분류는 프랑스의 위대한 사상가 몽테스키외가 제안한 정치와 법률 사상을 근거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예카테리나 정책의 눈부신 성장만큼 그늘도 당연히 있는 법이다. 경제와 공업의 성장이 바로 농노제를 근간으로 가능했다는 것이다. 사실 러시아의 농민은 모두 노예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노동자들 역시 실제로는 노예의 신분이었다. 러시아는 경제 성장에 있어 이런 농노의 혜택을 너무나도 많이 받았다. 노예를 노동자로 쓰면 돈이 안 드니 가격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데 유리했다. 1770년대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났지만 예카테리나 2세는 결코 영국과 같은 길을 가지 않았다. 오히려 농노제를 계속해서 고수하는 입장이었다. 이런 행보가 러시아를 결국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기도 했다.

 그에 대한 반발로 예카테리나 2세 재임 기간에 러시아 역사상 최대의 농민 봉기였던 '푸가초프의 난'(1773-1775)이 일어났다. 푸가초프를 지지하는 세력은 비단 농민만이 아니었다. 볼가강 유역의 바시키르인과 타타르인 등 비러시아 민족들 역시 그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푸가초프의 난은 푸가초프의 사형으로 1775년 실패로 끝이 난다. 이 사건 이후, 농민들을 두려워하게 된 귀족들은 농민들을 더욱 잔혹하게 착취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영토 확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크림 지방과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리투아니아의 영토를 확보하였으며, 폴란드와 오스만으로부터 영토를 빼앗기도 했다. 덕분에 재위 초기 2,000만 명이던 러시아의 인구가 3,600만 명으로 늘어났다. 게다가 이쪽 지역의 생산력과 문화 수준은 당시 러시아 중산 계층보다도 높았다. 이렇듯 남쪽과 서쪽에서 얻은 땅은 러시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예카테리나의 정책에 반발하여 일어난 푸가초프 난의 리더 푸가초프의 모습
푸가초프의 난을 일으킨 푸가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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