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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18_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의 등장

by 티제이닷컴 2023.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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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 또 한 명의 여제가 우스펜스키 사원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이로써 표트르의 개혁은 마침내 충실한 계승자를 만나 계속 이어질 수 있었으며, 러시아 역시 다시금 발전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그 여제가 바로 이번 편부터 다룰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재위 1762~1796)이다.

 독일인이었던 그녀는 표트르에 이어 러시아 역사상 두 번째로 대제라는 칭호를 얻게 되는 인물이다. 남편의 시신을 밟고 황제 자리에 오른 그녀는 표트르 대제의 진정한 후계자로 등극했다. 가진 것 하나 없이 러시아로 온 그녀는 63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영토를 러시아의 손에 쥐어주기도 했다.

 1744년, 14살의 한 프로이센 소녀가 고작 옷 몇 벌만 가진 채 러시아 궁정에 나타났다. 그 소녀의 이름은 소피아 아우구스타로, 프로이센 슈체친 지역 어느 공작의 딸이었다. 그녀는 러시아 황태자의 아내감으로 뽑혀 러시아 궁전으로 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이 러시아의 역사와 이 소녀의 운명을 바꾸어놓을 줄은 당시로서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수준 높은 유럽의 교육을 받고 자란 소피아는 어머니를 따라 유럽을 여행하면서 각국의 궁전을 방문했다. 곳곳에서 많은 것을 배운그녀는 예의범절은 물론이거니와 궁정의 암투 역시 익숙했다. 이 때문에 많은 후보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녀는 열일곱 살에 황태자의 아내로 뽑혔다.

 러시아로 온 소피아는 빠르게 러시아인들의 민심을 얻는 데 성공한다. '예카테리나'라는 러시아식 이름으로 바꾼 소피아는 러시아어를 부지런히 공부했으며, 종교도 동방정교로 개종했다. 얼마 후 그녀가 능숙한 러시아어로 성서를 경건하게 낭송할 수 있게 되자 이를 들은 대주교와 사도들은 감동의 눈물까지 흘렸다. 예카테리나는 한밤중에도 자다가 일어나서는 러시아어를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복습하곤 했다. 졸지 않으려 외투도 걸치지 않은 채 맨발로 공부를 하다가 심한 감기로 목숨이 위태로웠던 적도 있었다. 이렇게 이방인이 아닌 러시아라는 국가의 일원이 되고자 누구보다 노력한 예카테리나의 의지에 감동한 종교계, 정치계와 일반 백성들까지도 그녀를 존경하게 되었다. 

 14살의 어린 소녀는 과연 어떤 동기에서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훗날 예카테리나 2세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다른 의도를 갖고 그렇게 행동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때 나를 지탱했던 것은 바로 공명심이었다. 당시 내 마음속 깊은 곳에는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내가 자신감을 잃지 않고 주동적으로 행동하면 언제고 러시아의 여황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이 소녀는 분명 화려하고 부유한 러시아의 궁정과 끝없이 넓은 러시아의 영토 위에서 권력의 힘을 느꼈을 거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언급한 공명심은 바로 야심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러시아에 오래 머무르고 러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과제가 러시아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인 걸 잘 알고 있던 듯하다. 이 점에서는 누구보다도 현명했다.

 예카테리나와는 반대로 어린 시절부터 독일에서 자란 표트르 3세(1728~1762)는 프로이센의 군사 제도와 독일의 문화를 광적으로 숭배했다. 러시아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했기에 그는 죽기 전까지도 말할 수 있는 러시아어가 고작 몇 마디 안되었다. 오히려 그는 러시아를 싫어하는 쪽이었다. 프로이센인이던 예카테리나는 러시아를 위했고, 러시아인이던 표트르 3세는 프로이센을 지향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표트르 3세는 자신의 아내 역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아내를 내팽개쳐두었던 그는 신혼 첫날밤에도 아내의 존재를 무시하고 침대 위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병정놀이를 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예카테리나는 걱정과 불안이 끊이지 않는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언제 버려질지, 언제 죽임을 당할지 한 치 앞을 모르는 운명 속에서 괴로워했던 그녀의 심정은 예카테리나가 그녀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전 책을 읽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괴롭지 않을 때도 없습니다. 영원히 즐거울 수도 없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던 그녀의 유일한 선택은 바로 조용히 인내하며 그저 때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던 것은 아니다. 미래를 위한 대비를 하나하나씩 해나갔다. 뼈를 깎는 고통을 참으며 책을 읽고 치국의 방법을 공부하며 서서히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 갔다. 정계나 군대의 주요 인사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자신의 정부들을 곳곳의 요직에 심어두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문화를 알아가던 중 예카테리나는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러시아의 사상과 문화 수준이 특히 서유럽에 비해 심히 떨어진다는 걸 깨달았다. 이에 그녀는 만일 자신이 러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입지를 다지게 되면 반드시 표트르 대제의 개혁을 계승하여 유럽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유럽과의 격차를 좁혀 동등한 지위에 오르게 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됐다.

 1762년, 옐리자베타 여제가 세상을 떠나고 표트르 3세가 왕위에 즉위했다. 하지만 표트르 3세는 상복을 입기는커녕 연회를 열어 밤새워 놀기 바빴다. 그의 행동은 반발을 사기 딱 좋았다. 반면 예카테리나는 상복을 차려입고, 여제의 영전에서 끝없이 기도를 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민심은 더욱더 표트르 3세에서 예카테리나에게로 기울었다. 타고난 정치인 기질이 있던 그녀는 옐리자베타의 죽음마저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데 사용하였다.

표트르 대제의 정신을 잇는 예카테리나 2세의 초상화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나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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