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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28_예카테리나, 표트르의 공통적 면모와 농노제

by 티제이닷컴 2024.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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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카테리나와 표트르의 공통점과 차이점

 1720년대~30년대, 러시아는 발전을 계속하기는 했지만, 발전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여러 분야에 많은 장애물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때 예카테리나 2세가 표트르의 대업을 계승했다. 표트르 대제가 발트해 연안의 영토를 손에 넣는 임무를 완성했다면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가 이루지 못했던 두 번째 문제인 흑해를 러시아의 영역권으로 만드는 임무를 완수했다. 예카테리나는 크림반도에서 대립 구도를 이루던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일에 예카테리나는 적지 않은 시간과 힘을 쏟았다.

 한편으로 여제는 국가 질서를 강화하는 데도 노력했다. 귀족 계층에 힘을 싣고, 군대의 힘을 강화했으며, 산업과 경제, 문화의 발전을 추진해 나간 것이다. 그녀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 방침을 더욱 확대하여 발전해 나갔다. 표트르가 제정했던 정책들은 대부분 틀을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실현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이 정책들이 상류 계층뿐만이 아닌 모든 계층을 아우를 수 있어야 했는데 예카테리나 통치 시기에 이르러서야 이 정책들이 전 사회 계층, 즉 시민, 상인, 수공업자, 농민에게까지 확대됐다.

 문화, 교육 분야에 있어서는 예카테리나는 표트르 대제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해 나갔다. 유럽 문화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유지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어린 시절 러시아가 아닌 유럽에서 교육받았으며, 다양한 언어를 공부했던 교양 있는 유럽 여성이었다. 유럽의 문학만 아니라, 경제, 정치에도 두루 해박했으며 그 당시 유행한 계몽사상을 추종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가 정책을 추진하는 방식에 있어선 표트르 대제와 결이 조금 달랐다. 그녀는 국민들에게 고통이나 압박을 주진 않았다.


농노제, 러시아 경제 발전의 근간이자 한계점

 정치, 경제, 계몽, 군사 정책에 있어 그녀는 표트르의 개혁을 그대로 계승했다. 한 가지 고무적인 사실은 그녀로 인해 러시아의 개혁이 새로운 발전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표트르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농노제를 개혁할 수는 없었다. 유럽 자본주의 사회 발전이 자유 민권의 발전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제는 유럽 주류에 반하는 농노제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않았다. 왕위에 대한 정당성이 부족한 그녀는 굳이 귀족들의 반발을 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예카테리나는 본인의 남편을 포함하여, 표트르 대제 이후의 여러 황제처럼 쿠데타로 인해 권력이나 목숨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농노제라는 문제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대신 그녀는 귀족들에게 자유를 줌으로써 러시아 국민들을 해방하려 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귀족의 해방을 공표함으로써 표트르 대제 때부터 귀족에게 강제적으로 시행했던 정책들, 예를 들면 평생 부역의 의무를 져야 한다는 등의 정책을 없애며, 귀족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이때부터 귀족들은 국가에 대한 의무 이행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됐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군대에 갈 수도 있고 농장에서 일을 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예카테리나의 후계자들은 이를 계기로 러시아인들에 대한 제약을 조금씩 풀어나갔다. 하지만 그 속도는 매우 느렸으며, 그 과정이 순탄치도 않았다. 마침내 알렉산드르 2세에 이르러서야 농노제를 없애는 데 성공했다.

 표트르 대제는 위대한 제국을 수립했지만 그 제국의 국민들은 모두 노예 신분이었다. 예카테리나는 표트르 대업을 이어 나가는 한편 러시아인들을 해방하려 노력했다. 물론 그 범위가 러시아인 전체가 아니라 일부이기는 했지만 그 자체가 시발점이 되어 결국 농노제 폐지로 이끌 수 있었다.


예카테리나 2세와 계몽사상

 러시아에 도착한 예카테리나는 이미 인도주의에 관한 책들을 많이 읽은 다음이었다. 그녀는 볼테르, 디드로, 루소, 몽테스키외의 작품을 즐겨 읽었으며 그들과 서신을 주고받기도 했다. 예카테리나는 볼테르와 주고받은 편지를 죽을 때까지 보관했으며, 디드로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초청하기도 했다. 몽테스키외의 작품은 예카테리나 교서에도 대거 반영했다.

 러시아는 전제 군주 제도를 표방하는 국가였지만 예카테리나가 실제적인 권력자이자 국내 정치 집행자였기 때문에 예카테리나뿐만 아니라 주위 인물들도 계몽사상에 심취하게 됐다. 이 때문에 볼테르 작품은 황궁은 물론 사회 각 계층에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러시아의 도서관만 아니라 개인들도 볼테르 작품을 소장하려 했으며, 심지어 농민들에게도 그 사상이 전파됐다. 계몽사상이 러시아에 미친 영향은 절대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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