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투조프 장군의 일생
쿠투조프는 예카테리나 2세, 파벨 1세, 알렉산드르 1세, 모두 세 명의 황제를 섬겼다. 험난하면서도 찬란했던 그의 일생은 모두 이 세 명의 군주와 관련이 있다. 게다가 그의 인생은 군주에 따라 극과 극을 달렸다.
그가 처음으로 전쟁에서 다쳤을 때 그가 소속됐던 부대의 총사령관은 예카테리나 2세에게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모스크바 군대의 부상자 중 쿠투조프라 불리는 중위가 있습니다. 그는 새롭게 조직된 부대를 통솔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 노련한 군인들을 능가할 정도입니다."
그러자 여제는 쿠투조프에게 1만 루블의 상금을 하사했으며 직접 의사를 찾아가 이렇게 부탁했다. "반드시 쿠투조프의 부상을 낫게 해야 해요. 그는 큰 장군이 될 인물이에요."
쿠투조프는 용맹했을 뿐 아니라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전술을 과감히 버리고 융통성 있고 재빠른 전술을 구사했다. 이 때문에 그는 18세기에 가장 명망 있는 지략가 가운데 한 명이 될 수 있었다. 한편 쿠투조프는 천재적인 외교관이자 정치가이기도 했다. 1792년 특사의 자격으로 오스만 튀르크에 파견됐던 그는 러시아의 국익과 관련된 일련의 문제들을 모두 해결했다. 또한 베를린에 2개월 동안 머물면서 프로이센을 반프랑스 동맹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자신에게 엄격하면서도 솔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쿠투조프는 금세 예카테리나 2세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예카테리나 2세와는 달리 파벨 1세와 알렉산드르 1세는 이 노장의 비범함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파벨 1세와 알렉산드르 1세는 프로이센의 군사적 전통을 맹목적으로 따라 하려 했다. 그들은 심지어 프로이센군의 가발과 수염 모양까지 모방하려 하면서 표트르 대제 때부터 형성되어 온 러시아 군대 체계를 완전히 무시했다. 그들의 행동은 쿠투조프를 중심으로 하는 러시아군의 조롱을 받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에 따라 쿠투조프와 알렉산드르 1세 사이에는 앙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르는 될 수 있는 한 쿠투조프를 기용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역사는 어쩔 수 없이 쿠투조프를 선택하도록 만들었으며, 이 때문에 알렉산드르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졌다.
러시아의 최고 사령관이었던 쿠투조프는 평생 빈곤하게 살았다. 엄청난 빚을 안고 있었던 그는 죽기 전까지도 빚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그가 죽고 난 후에도 빚쟁이들은 매일 그의 집을 찾아가 가족을 괴롭혔지만 냉정한 알렉산드르 1세는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쿠투조프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그를 미워했고 시기했다. 하지만 역사는 쿠투조프의 위대함을 증명해 주었으며, 나폴레옹의 적수는 쿠투조프밖에 없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 됐다.
1812년의 산물, 전제 통치에 대한 거부 반응을 보이다
알렉산드르 1세가 의기양양하게 유럽 사회에 진출했을 당시 러시아에는 이미 전제 통치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싹트고 있었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알렉산드르 1세 수하의 군인들은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세계를 뒤엎을 만한 엄청난 변화를 직접 목격했고, 이에 따라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은 러시아의 귀족 청년 장교들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이 참을 수 없는 것은 프랑스와 같은 방식의 패배가 아니라 차르 독재 아래서 살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에 그들은 스스로를 '1812년의 산물'이라 불렀다.
데카브리스트의 등장
데카브리스트는 1825년 12월 러시아 최초로 근대적 혁명을 꾀한 혁명가들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 점령에 참여해 자유주의 사상을 접한 상류층 청년 장교들이 주를 이루었다.
직접 프랑스 혁명의 열기를 목격했던 데카브리스트 파벨 페스텔은 다음과 같은 글로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다. "1812년에서 1815년까지 발생한 사건은 그 이전에도 끊임없이 발생했으며 이후로도 끊임없이 발생할 것이다. 왕조는 앞으로도 끝없이 바뀔 것이다. 얼마나 많은 황제의 자리가 뒤바뀔 것이며 또 얼마나 많은 제왕이 새로 추대될 것인가. 얼마나 많은 왕국이 사라지고 또 얼마나 많은 국가가 새로 세워질 것인가. 얼마나 많은 황제가 폐위되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황제라 칭하고 나설 것인가. 그사이 혁명은 또 몇 차례나 일어날 것이며 쿠데타는 또 얼마나 발생할 것인가. 현명한 자들은 혁명의 필요성만 아니라 모든 혁명에 수반되는 조건과 시기를 파악하고 있다. 각 세기는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으므로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혁명이다. 포르투갈에서부터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모든 곳에서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심지어 영국과 오스만 튀르크라는 전혀 다른 나라에서도 모두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유럽도 마찬가지다. 혁명의 정신은 각국의 사상가들을 격동시킬 수 있어야 한다. 혁명의 정신으로 인해 혁명이 일어나고 혁명의 법칙이 생겨나며 지식인들의 머릿속에 이 모든 것이 뚜렷하게 각인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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