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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34_데카브리스트와 관련된 몇몇 이야기(데카브리스트 광장과 로맨스)

by 티제이닷컴 2024.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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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브리스트 광장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유명한 광장이 있다. 참정원 광장이라 불렸던 이곳은 훗날 청동 기사 동상이 세워지면서 표트르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을 데카브리스트 광장이라 부른다. 바로 1825년 황제의 통치를 거부하고 농노 해방을 부르짖었던 데카브리스트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1825년 12월 14일, 데카브리스트 광장에서 울려 퍼졌던 총성과 포성, 그리고 말발굽 소리와 비명은 러시아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이곳에서 1,261명의 혁명 참가자들과 국민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 피가 러시아 땅을 적셨다.

 1925년 데카브리스트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이곳을 데카브리스트 광장이라 부르고 있다.


 시베리아에서 피어난 데카브리스트의 로맨스 여담

 데카브리스트들의 운명은 그렇게 끝이 났지만 러시아인에게 데카브리스트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그 순간 차가운 시베리아 땅에서는 고귀함과 영광, 사랑과 신앙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자신들의 이상을 추구하다 유배를 떠난 데카브리스트는 전혀 고독하지 않았다. 데카브리스트들의 아내와 연인이 자신들의 재산과 지위, 안락한 삶을 포기한 채 남편과 애인이 유배된 멀고 먼 시베리아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1) 트루베츠카야 공작부인

 트루베츠카야 공작부인은 데카브리스트들의 아내 가운데 가장 먼저 혹한을 뚫고 시베리아로 향한 용감한 여성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러시아의 전쟁 영웅인 라예프스키였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와 비범한 재주를 모두 갖추어 뭇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남편이 러시아로 유배를 떠나자, 그녀는 평생 남편을 따르겠노라 다짐했다. 당시 그녀는 20살을 막 넘긴 데다 사내아이까지 출산한 후였다. 그녀의 행동은 곧 러시아의 상류 사회와 문화계를 동요했다. 모스크바를 떠나기 전 사람들은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그녀를 배웅해 주었는데 트루베츠카야 공작부인을 남몰래 흠모하던 푸시킨도 그때 그 자리에서 함께 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푸시킨은 그녀에게 바치는 서사시 '폴타바'를 완성했다.

시베리아 처량한 황무지
당신이 내뱉은 마지막 목소리는
나의 유일한 보석이자 성물
내 마음속 유일한 사랑의 환상이여


 또 다른 시인 네크라소프는 트루베츠카야의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기억하기 위해 방대한 역사적 자료를 수집했으며 그녀의 아들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그녀의 아들이 어머니가 프랑스어로 써놓은 일기를 읽어 내려가자 네크라소프는 벽난로 앞에 무릎을 꿇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머리를 감싸 쥐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 장편 서사시에 전력을 쏟았던 네크라소프는 결국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시에는 트루베츠카야가 시베리아의 광산 갱도에서 남편을 만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의 앞에서 나도 모르게 무릎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남편을 끌어안기 전 나는 내 입술을 그의 쇠사슬 쪽으로 가져갔다.
그 순간 사람들의 말소리나 갱도의 육중한 소리
그 어느 것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모든 동작이 멈추어버린 듯했다.
그리고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에도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그들.
그 창백하고 엄숙하며 격앙된 얼굴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우리의 만남으로 인한
행복과 고통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신성한, 신성한 침묵이여!
그곳은 슬픔과 함께 숙연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때부터 쇠사슬에 입을 맞추는 것이 고결한 사랑과 신앙을 대표하는 모습이 됐고 수많은 화가가 이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2) 어느 프랑스 여인의 사랑

 트루베츠카야만이 아니라 프랑스 출신의 어느 아가씨의 이야기도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대지주의 아들이자 기마 부대의 대위였던 연인이 시베리아로 유배를 가게 됐다는 소식을 파리에서 들은 이 프랑스 여인은 즉시 러시아로 달려가 자신들의 결혼을 허가해 달라고 요구했다. 당국의 관리는 난처해하며 이 소식을 황제에게 전했고 니콜라이 1세는 즉시 여자를 불러들였다. "계속 결혼을 고집한다면 너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게다가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로 갔던 다른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처럼 사람들의 존경 역시 기대할 수 없어."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인을 찾아 시베리아로 떠났다.

 그 행동은 결국 황제까지 감동을 줘 니콜라이 1세는 관례를 깨고 그들의 결혼을 허락해 주었다. 하지만 시베리아의 관리들은 황제의 명령을 받지 못했다는 핑계로 두 사람의 만남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여자는 죄인들이 유배된 마을을 돌아다니며 연인의 소식을 물어봐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도떼와 마주치게 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려주었고, 지극한 사랑에 감동한 강도들은 백방으로 수소문을 한 끝에 그 애인을 찾아주었다. 마침내 결혼 허가증을 얻은 여자는 꿈에도 그리던 연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매일매일 계속되는 고된 노역에도 결코 후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몇 년 후 남편의 노역은 종신 유배로 바뀌어 이전보다 상황이 좋아지긴 했지만 혹독한 기후와 힘든 노역으로 지친 그녀는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년 후 남편 역시 그 뒤를 따랐다. 이처럼 데카브리스트들의 귀족 출신의 아내나 연인 가운데 차가운 얼음 위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무척 많았다. 한편 당시 연인에게 보내는 시에 묻어나는 절절한 사랑은 철의 심장을 가졌다는 검열관의 가슴을 울리기에도 충분했다.

시베리아 전경입니다
시베리아의 바이칼호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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