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뉜 데카브리스트
데카브리스트들은 서유럽 국가 문명에 완전히 부합하는 사회 제도를 실현하려 했다. 그들은 러시아가 매우 낙후되어 있으며 농노제와 군주제가 조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두 가지 방식의 혁명을 제안했다.
온건파는 계몽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서양 제도를 들여와 천천히 농노제와 군주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강경파는 더욱 강력한 방식을 원했다. 그들은 무장 쿠데타로 황제와 황족들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해야만 러시아에 공화국을 세우고 의회를 수립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당시 신하들로부터 데카브리스트들이 농노제를 폐지하고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알렉산드르 1세는 대수롭지 않은 듯 그들의 명단을 던지며 이렇게 말했다. "나도 젊었을 때는 이런 걸 생각해 봤다." 하지만 얼마 후 자신과 가족이 무장 쿠데타로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알렉산드르 1세는 즉시 데카브리스트들을 잡아들일 것을 명령했다.
데카브리스트 이후 러시아, 대문호 푸시킨의 죽음
러시아의 첫 번째 혁명가였던 데카브리스트들이 러시아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이상에 대한 신념과 그로 인한 죽음은 러시아인들의 영혼을 움직였고, 그들은 러시아 민족의 가슴에 영원한 이상주의자로 각인됐다.
데카브리스트의 혁명 이후 러시아 황제였던 니콜라이 1세는 푸시킨을 불렀다. "만약 그대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소?" 황제의 질문에 푸시킨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분명 혁명에 참여했을 겁니다."
1837년 2월 10일, 푸시킨이 세상을 떠나자 니콜라이 1세는 그의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도록 명령했으며, 국민들의 참석도 불허했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은 저마다 '자유'를 읊조리며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장례식에 참석한 푸시킨의 친구는 서럽게 우는 한 노인에게 물었다. "혹시 그의 친척이십니까?" 그러자 얼굴 가득 눈물범벅이 된 노인이 대답했다. "아니오. 하지만 나는 러시아인이오."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난 30년 후 또 한 명의 위대한 사상가가 데카브리스트가 걸었던 그 길을 그대로 따랐다. 그의 이름은 '알렉산드르 게르첸'(1812~1870)이었다. 그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났던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14살이었던 나는 인파에 묻혀 그곳에 있었다. 그때 나는 피로 얼룩진 제단 앞에서 맹세했다. 목숨을 잃은 그들을 대신해 복수하기로. 황제와 성스러운 제단과 그들의 대포에 맞서 끝까지 투쟁하기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게르첸은 언제나 선생님으로부터 핀잔이나 듣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이런 결심을 내뱉자 선생님들은 깜짝 놀라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난 사실 네게 별다른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너의 그 위대한 생각이 너를 결국은 더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 거야. 그 다짐을 꼭 마음속에 새겨두거라."
게르첸만이 아니라 체르니셰프스키를 비롯한 러시아 해방 운동가와 조국의 구원을 위해 애썼던 러시아 지식인들의 가슴에는 데카브리스트들의 이상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가 단단히 자리를 잡아갔다.
데카브리스트들의 이상은 이처럼 지식인들에 의해 계승됐으며, 러시아인은 끝까지 데카브리스트들의 이상을 존중했다. 레닌은 데카브리스트들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들은 게르첸을 일깨웠고, 게르첸은 혁명을 전개해 나갔다. 혁명에 호응하는 한편 혁명을 확대하며 강화한 것은 평범한 지식인 혁명가들이었다. 그들이 바로 체르니셰프스키에서부터 인민의 의지파에 이르는 영웅들이다."
인민의 의지파
1879년 결성된 인민주의자들의 비밀 조직. 테러리즘을 가장 중요한 투쟁 수단으로 삼은 이 조직은 1884년까지 거의 모두 체포됨으로써 대중에 뿌리내리지는 못했으며 개인적 혁명 운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훗날에 이 조직은 마르크스주의자, 특히 레닌에 의해 비판되었으며, 러시아 혁명의 주류는 이들에게서 볼셰비키로 옮겨졌다.
러시아 현대화의 한계
그러나 러시아 지식인들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러시아의 운명을 움켜쥔 손을 단 한 번도 놓지 않았다. 이에 따라 그 후 100년 동안 러시아는 매우 모순적인 상황에 부닥쳤다. 전쟁에서 패할 때마다 황제는 개혁을 실시했지만 전제 제도와 농노제에 대한 개혁은 번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다시금 곤경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의 현대화는 이처럼 무거운 짐을 진 채 시작됐다. 러시아 역대 차르들이 모두 그랬듯이 개혁은 언제나 경제, 과학 기술, 교육 분야에서만 단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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