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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37_농노제, 러시아 발전의 발목을 잡다

by 티제이닷컴 2024.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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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발목을 잡는 농노제

 유럽의 산업혁명으로 인해 러시아는 이내 영국, 프랑스 같은 국가에 뒤처지고 말았다. 러시아는 거대한 파도와도 같은 산업혁명에 직면해서도 수동적이고 느릿느릿한 태도를 보였다. 무엇보다 농노제는 러시아 산업화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한 크림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봉건 농노제의 패배를 상징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유럽에서의 모든 패권을 잃어버렸다. 러시아 역사상 가장 뼈아픈 패배였다.

 고질병 같은 농노제는 점점 러시아의 활력을 빼앗아 갔다. 러시아의 정치계는 뇌물과 부패가 성행했고, 아무렇지 않게 국고에 손을 대는 이가 있는가 하면 벌건 대낮에 뇌물을 주고받는 이들도 있었다. 한 번은 니콜라이 1세가 군관을 시켜 당시 추진되던 공사의 진행 상황을 조사하도록 지시한 적이 있었는데 공사 책임자는 거짓으로 기록된 보고서와 함께 거액의 뇌물을 그 군관에게 건네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니콜라이 1세는 무기력한 어조로 황태자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보아하니 전 러시아를 통틀어 무언가를 훔치지 않은 사람은 너와 나밖에 없는 듯하구나."

 부패한 정치와 계속되는 전쟁으로 국민들이 받는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군인들의 반란, 농노들의 폭동으로 인해 러시아는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한 대신은 당시 러시아의 상황을 황제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농노 문제는 국가의 발밑에 놓인 화약고와 같습니다." 결국 니콜라이 1세는 농노 해방에 관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끝내 실행하지는 못했다. 지금 농노제를 건드리면 상황이 더 악화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니콜라이 1세는 회한과 연민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자신의 후계자인 알렉산드르 2세에게 "너는 러시아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나는 가장 힘들고 무거운 짐은 내가 지고 너에게는 질서 있고 평화로우며 행복한 국가를 물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신은 또 다른 계획이 있으셨나 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전쟁에서 불리해지자 니콜라이 1세는 강력한 러시아가 자신의 환상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별안간 깨달았다. 그리고 이 갑작스러운 깨달음은 마치 한 잔의 독주처럼 니콜라이 1세의 생명을 앗아가 버렸다. 1855년 2월 18일 밤, 니콜라이 1세는 모스크바, 키예프, 바르샤바에 동시에 이런 내용의 전보를 보내도록 했다. "황제는 지금 죽고 있다. 모든 이에게 이별을 고하노라." 하지만 그의 죽음이 러시아의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이는 러시아의 유명한 작가이자 사상가인 체르니셰프스키가 감옥에서 완성한 소설의 제목이다. 그리고 러시아 귀족들이 당면한 문제이기도 했다.

 체르니셰프스키는 혁명을 통해 농노제와 전제제도를 폐지하려 했다. 그는 "머지않아 이곳에는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혁명이 시작되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들을 따르겠다."라고 했지만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마치 그의 결의에 응답이라도 하듯 여기저기서 농민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1860년에만 하더라도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폭동이 무려 108건이나 발생했다.

 한 시인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비유했다. "이제 우리의 발밑에는 단단하고 조금의 동요도 없던 예전의 토양은 없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면 멀리 해안의 얼음 위에 서 있는 자기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농민들이 시도한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실패하자 러시아 정부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했다. 알렉산드르 2세(재위 1855-1881)는 귀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농민들 스스로 해방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먼저 그들을 해방하리라."

 사실 알렉산드르 2세와 귀족 지주들은 농노제에 아무런 이점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19세기 중엽부터 러시아의 농사는 흉작을 거듭했다. 농작물과 종자의 비율은 3.5대 1 정도였으며 단위 생산량은 수십 년, 아니 100년 가까이 이렇다 할 변동은 없었다. 1860년 러시아의 헥타르 당 식량 생산량은 영국과 비교했을 때,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지주들은 농노에 대한 심한 매질과 낮은 급료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결과는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어떤 사람은 자유 고용제와 농노제를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자유 고용제하에서는 모든 것이 연소하고 있었으며, 준비한 원료는 언제나 모자랐다. 자유농민들이 일하는 시간은 농노들보다 적었고 쉬는 시간은 훨씬 많았다. 하지만 자유농민들의 생산량은 농노들의 2~3배에 달했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온 것일까? 아마 기꺼운 마음으로 일하는 것이 고된 노역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입니다
농노제 폐지를 선포한 알렉산드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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