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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38_러시아 농노제 폐지, 경제 현대화에 이르다

by 티제이닷컴 2024.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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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노제 폐지되다

 차르 정부의 일부 인사들까지도 러시아가 너무도 오랫동안 농노제를 유지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이를 폐지하지 않으면 수십 년 후에는 러시아 전체가 무너질 수 있음을 조심스레 지적했다.

 1861년, 마침내 러시아를 곪게 한 농노제가 끝을 맺었다.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제 폐지를 법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이제 러시아는 서유럽에 뒤처진 지 100년 만에 마침내 현대화로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농노들은 자유를 얻었고 지주들은 더 이상 농노들을 사고팔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토지는 여전히 지주들의 소유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실제 토지 가격의 2~3배가 넘는 배상금을 지불해야만 토지를 얻을 수 있었다.

 해방된 농민들이 공장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거액의 배상금이 공업 발전 자금으로 사용되면서 수공업 공장이 기계 공장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1880년대 말이 되어서야 드디어 러시아도 산업혁명이 기본적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하지만 득이 있으면 실도 있는 법이다.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제 해방에 앞서 귀족들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모두 믿어주시오. 나는 지주들의 이익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모두 할 거라는 사실을!"

 농민들이 얻은 척박한 토지는 1861년 당시 시장 가격으로 치면 5억 루블에도 못 미쳤다. 그러나 1905년까지 20억 루블에 달하는 배상금을 바쳐야 했기에 농민들은 공공 부역과 같은 의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레닌은 러시아의 농민은 자유를 획득한 순간부터 이미 모든 것을 박탈당했다고 말했다.

 한편 차르 정부는 다른 분야에서도 개혁을 단행했다. 행정 개혁을 통해 도시마다 제정 러시아의 의회인 두마 또는 자치 기관을 두었지만, 이들은 모두 행정 당국의 엄격한 감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오로지 경제, 위생, 교육만 관리했다. 배심원 제도와 변호사 제도를 만들고 공개 심판제를 시행하는 등 사법 개혁도 심도 있게 진행했지만 이 역시 여전히 완벽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혁명가들이 재판을 받지 않고 곧장 시베리아에 있는 유배지로 추방당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한편 러시아는 강제 부역 제도와 종신 부역제를 폐지하고 의무 병역 제도를 도입했다. 이처럼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은 허점이 많았기에 러시아에서는 그 후에도 여러 번 개혁과 정책 조정을 단행했다. 하지만 그 역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라는 소설에서 레빈의 입을 빌려 당시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오늘날 바로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바뀌고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새롭게 준비되고 있다." 한편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1851년에서 1905년까지 시간에 대해 '상상하기조차 힘들다'라는 말보다 더 적당한 표현이 있을까?"

 비록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개혁으로 인해 농민에 대한 지주들의 봉건적 통치는 막을 내렸고, 2,100만 명에 이르는 농노들은 억압과 착취의 쇠사슬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새로운 경제 제도에 적응하기 위해 러시아의 정계 역시 조정에 들어갔다. 이 모든 조치는 러시아가 현대화되는 전환점이 됐다.


러시아 경제의 현대화

 1880년대 말에는 러시아에 1만 8,500킬로미터의 철도가 새로 개설되었으며 강에는 증기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공장제 공업은 주요 공업 부문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으며 석유 또는 기계 제조와 관련된 신흥 산업이 출현했다.

 한편 1892년, 모스크바 산업계를 이끌던 모로조프는 감격에 벅차 이렇게 말했다. "군주의 은혜는 관세를 20퍼센트 인상하면서 더욱 높아졌도다." 사실 관세 인상을 통한 보호 무역 정책은 신임 재무장관 세르게이 비테의 정책이었다. "자신만의 사업을 하는 것은 경제적 임무일 뿐 아니라 정치적 임무이기도 하다."라는 신념을 가졌던 비테는 재정 문제만을 중시했던 전임 재정대신과 달리 산업 발전, 특히 중공업 발전을 주요 정책으로 내걸었으며 철도 건설을 통해 금속 산업과 연료 산업의 발전을 꾀했다. 그는 또한 간접세를 인상하고 국제 자본을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자금을 확보했다.

 비테의 정책은 러시아의 산업에 전례 없는 발전을 가져왔다. 비테가 재임한 기간 동안 석탄과 강철의 생산량은 각각 2배와 4배 증가했다. 철도 역시 87퍼센트나 증설됐으며, 공업 생산의 증가율은 7.5퍼센트에 이르렀다.

 반세기 동안의 발전을 통해 러시아는 산업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유럽과 미국의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또한 크림 전쟁에 패배한 이후 실추된 유럽에서의 지위를 어느 정도 회복했으며 국력도 상당히 강화됐다. 현대화를 통해 러시아는 백은 시대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이 시대에는 자산 계급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급진주의 사상과 함께 무산 계급의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 사상이 잇달아 출현했다. 이들 사상은 현대화 사회의 양대 계급인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탄생을 가져왔으며, 현대화를 심도 있게 발전하고 구 정치 제도를 철저히 타파하기 위해 정치적 힘을 비축하는 데 공헌했다.

 러시아 역사학자인 마르크 래프는 진정한 현대화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연쇄 반응처럼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현대화 과정에서도 언제나 차르가 지도자였다. 차르는 통치 위기를 벗어나는 수단으로 현대화를 이용한 것뿐이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의 현대화는 전제 제도를 기초로 이루어지는 상황이었으며 그 역시도 주로 경제 분야에만 국한된 한계점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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