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수 산업 발전과 위태로운 산업 불균형
인류는 단 한 번도 전쟁의 위협에서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한 손에는 달러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원자폭탄을 휘두르며 이렇게 선언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는 미국인들이 세계를 끌어나갈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스탈린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전쟁하는 중에는 모두 힘을 합치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정말 어려운 일은 전쟁이 끝나고부터 시작된다. 전쟁이 끝나면 각기 다른 이해관계 때문에 동맹이 분열되어 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1946년 초, 미국의 상원 의원인 바루크는 "미국은 지금 냉전 상태에 처해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한 시대를 대표했던 '냉전'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한편 트루먼의 고향인 풀턴에서는 처칠이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 "발트해의 슈체친에서부터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에 이르기까지 유럽 대륙을 가로질러 철의 장막이 쳐져 있다."
1949년 4월 4일, 미국, 영국, 프랑스 등 12개 국가는 북대서양 조약에 조인했다. 그리고 1954년, 독일 연방 역시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했다. 서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같은 상황에 소련은 압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본토에서는 조금의 손해도 입지 않은 미국에 비해 소련의 손실은 실로 엄청났다. 한 영국인은 전후 소련을 방문한 후 놀란 나머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스탈린그라드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60만 명이나 살고 있던 현대화된 도시에 남은 거라곤 뼈대가 앙상한 집 몇 채뿐이었다. 소련에는 손실을 본 도시가 수를 셀 수 없었으며, 전쟁으로 가족을 잃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소련은 이제껏 늘 겪어왔던 압력만 아니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신무기의 공포에도 맞서야 했다. 그 신무기가 바로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위력을 가진 핵무기였다. "핵무기의 살상력은 기존에 우리가 생각하던 사고를 모두 뛰어넘을 만큼 놀랍다."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핵무기는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의 지도층은 국민들에게 전쟁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중공업과 군수 산업을 우선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계속해서 투쟁해 나갈 것을 호소했다. 이에 가장 먼저 호응한 것은 돈바스 광산의 인부였다. 그들은 스타하노프 정신을 외치며 광산 수직 갱도에 고여 있던 6억 5,000만 세제곱미터의 물을 모두 퍼냈으며, 2,500킬로미터에 이르는 허물어진 갱도도 복구했다. 이렇게 해서 돈바스는 다시 한번 소련 최대의 탄전으로 거듭났다.
소련의 국민들도 돈바스의 광부들처럼 어마어마한 단결력을 보여주었다. 1950년, 국민들의 힘으로 재건하거나 새로 건설한 대기업의 수는 6,200개에 이르렀고 공업은 23퍼센트라는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공업 생산 총액은 1940년에 비해 73퍼센트나 증가했으며, 농업 생산 총액 역시 1940년의 99퍼센트를 회복했다.
소련은 경제 영역보다 군사 영역에서 더 큰 성과를 이루어냈다. 스탈린은 소련의 안전을 위해 핵무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1946년 소련은 처음으로 원자로를 세웠으며, 1948년 8월에는 최초의 핵실험을 성공적으로 끝냄으로써 미국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는 20세기에 있어 무척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이로써 핵 세력은 균형을 이루게 됐으므로 두 개의 초강대국은 서로의 행동을 제약할 수 있었다. 이는 세계 평화를 보장하는 데 확실한 도움이 됐다. 영국의 처칠은 스탈린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스탈린이 물려받은 것은 쟁기질이나 하던 가난한 국가였다. 하지만 그는 핵무기를 갖춘 강대국을 남겨주었다."
하지만 눈부신 성과 뒤에는 여전히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경공업 생산 비율이 1940년에 비해 겨우 22퍼센트 정도 증가한 데다 면직물과 식품 가공업은 전쟁 이전 수준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공업 성장률은 1952년에 이미 11.6퍼센트나 하락했다. 소련은 5년이 채 되지 않은 기간 동안 경제를 신속하게 회복하긴 했지만 언제나 공업만을 중시했으며 농업 발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1955년 5월 14일, 소련과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8개 국가가 서유럽 진영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항하는 바르샤바조약기구를 결성함으로써 완전한 냉전체제를 구축했다. 이로써 서쪽의 엘베강에서부터 동쪽의 한반도 38선 이북까지 주둔했던 소련의 군대는 유럽, 더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 게다가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회원국에 속한 수백만 군대까지 소련을 지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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