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의 위대한 출항
1492년 8월 3일은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던 맑고 고요한 날이었다. 오전 2시경 콜럼버스는 산 호르헤 교회에서 성찬식을 치렀다. 그리고 날이 밝기 전 기함에 올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출항을 지시했다. 소규모 함대의 니냐 호, 핀타 호, 산타 마리아 호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팔로스항을 떠났다.
이즈음 포르투갈인들은 길이 70피트에 60톤짜리 캐러벨 선을 발명했다. 이 배는 갑판 아래 짐을 실을 수 있는 공간이 넓지는 않았으나 흘수선(배가 물 위에 떠 있을 때, 배와 수면이 접하는, 경계가 되는 선)이 낮아 해안에 접근하거나 작은 항만을 탐험하기에 적합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 원정 탐험 때 대부분 이 배를 이용했다. 캐러벨 선은 대부분 삼각 돛대를 달았는데, 약한 해풍에도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콜럼버스 함대의 니냐 호와 핀타 호가 바로 이 캐러벨 선이었다. 콜럼버스는 출항하기 전 일주일 동안 배의 활대를 수직으로 고쳐 세웠다.
콜럼버스 함대는 출항 후 가장 먼저 카나리아 제도에 기착해 물자를 보충하고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카라니라 제도를 기준으로 서쪽은 무역풍 지대였다. 남쪽은 회귀선 무풍지대였고, 북쪽은 그들이 귀환할 때 이용했던 서풍 지역이었다. 폭풍은 없었으며 북동풍은 따뜻하고 부드럽게 불어왔다. 무역풍과 해류가 항해를 돕고 있었기에 돛이나 밧줄을 당길 필요도 없었다. 콜럼버스 함대는 불과 열흘 만에 1,163해리를 항해했다.
항해한 지 3주가 지나도록 육지가 보이지 않았다. 선원들에게 불안한 기색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0월 10일 기러기 떼가 콜럼버스 함대 상공을 지나 서남쪽으로 날아갔다. 콜럼버스는 즉시 이 기러기 떼를 쫓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오랫동안 쌓여온 반란의 조짐이 최고조에 달했고,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다른 두 배의 선장이 기함으로 찾아와 콜럼버스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즉시 탐험을 중단하고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남풍을 타고 스페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콜럼버스는 가까스로 이들을 설득해 사흘이라는 시간을 얻어냈다. 다음 날 무역풍이 불기 시작하자 선원들은 더욱 불안해했고, 그날 저녁 다시 폭동을 일으켰다. 콜럼버스는 선원들에게 사흘만 더 항해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했다.
신대륙 발견
10월 11일 밤, 선원들은 혹시라도 육지를 지나칠지 걱정되어 모두가 잔뜩 긴장한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날 밤 둥근달이 함대 왼쪽 상공에 떠 있었고, 강한 무역풍은 마치 신대륙과 구대륙 사이 보이지 않는 마지막 벽을 무너뜨리기라도 하는 듯 힘차게 함대를 밀어냈다. 이때 핀타 호 전망대에 있던 선원이 서쪽 수평선 너멀 하얗게 빛나고 있는 해안 절벽을 발견했다. 꿈에 그리던 육지였다.
10월 12일, 콜럼버스는 이 섬에 상륙해 스페인 황실의 녹색 십자가를 꽂았다. 그러고는 선원들과 원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간단한 의식을 치르고 스페인 가톨릭 군주의 이름으로 섬을 점령한다고 선포했다. 콜럼버스는 이 섬에 '산살바도르'라는 이름을 붙였다. 10월 12일은 훗날 스페인의 국경일이 되었고, 지금도 아메리카 대부분의 국가가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유럽인이 서반구에서 최초로 발견한 육지는 오늘날 바하마 제도에 있는 한 섬의 동쪽 해안이다. 콜럼버스 전기 작가 모리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492년 10월의 그날, 신대륙은 자신을 정복한 카스티야인에게 예의 바르게 자신의 동정을 바쳤다. 그날 이후 인류는 그때의 경이, 신비, 쾌락을 두 번 다시 경험하지 못했다."
콜럼버스의 달걀
당시 포르투갈은 여전히 해상권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선박 주조 기술, 항해 기술, 선원 자질, 항로 확보 면에서 모두 스페인보다 한참 앞서 있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포르투갈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대서양 횡단 항로를 선택했다. 콜럼버스와 함께 떠난 선원들은 항해가 길어지고, 보이는 것이라곤 망망대해밖에 없자, 이대로 계속 순풍을 받으며 항해하다가는 영원히 스페인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이르렀다.
반면 콜럼버스는 반드시 인도에 도착할 것이고 인도와의 무역을 통해 부를 얻으리라 확신에 가득 찼다. 그러나 선원들은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자 뱃머리를 돌려 스페인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그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콜럼버스는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위치 측정을 통해 육지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콜럼버스는 불안해하는 선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항해 거리를 속이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을 설득했다.
이 중에는 그 유명한 콜럼버스의 달걀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달걀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콜럼버스는 삶은 달걀을 책상 위에 내리쳐 밑 부분을 조금 깨뜨려 세웠다. 콜럼버스의 달걀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해야 더 큰 세상을 알 수 있고 더 많은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콜럼버스는 강한 신념으로 그가 말하는 '인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앞으로 이곳이 무역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 생각한 콜럼버스는 멕시코만까지 탐험했다. 그리고 신대륙 발견 증거로 그곳 원주민 몇 명을 사로잡아 스페인으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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