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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포르투갈&스페인

[스페인] 펠리페 2세와 종교재판소의 마녀 사냥

by 티제이닷컴 2024.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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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2세의 정치

 1560년 펠리페 2세는 스페인 수도를 툴레토에서 마드리드로 천도했다. 그리고 마드리드에서 약 30마일 떨어진 깊은 산속에 엘에스코리알 궁전을 건설했다. 이것은 그가 생캉탱 전투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수도원 같은 궁전은 펠리페 2세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회색빛 화강암으로 기초를 다진 엘 에스코리알은 성벽, 궁전, 교회의 기능을 모두 갖춘 복합 건축물이다. 교회 내부는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지만, 외부는 엄숙하면서도 소박하고 보수적이다. 이것은 펠리페 2세의 음울한 성격과 중앙집권적 전제정치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펠리페 2세는 이곳에서 일상을 보내고 제국을 다스렸으며 죽음을 맞이했다.

 펠리페 2세는 대단한 일벌레였다. 그는 국왕으로서 매우 검소하고 시간을 준수하는 모범을 보이기는 했지만 매우 몰인정했다. 또한 일을 처리할 때 빈틈이 없었으며 열정적이고 한편으로는 교활한 면모도 있었다. 그는 엘에스코리알 궁전의 작은 방에서 하루 종일 직접 많은 일을 처리했다. 직접 관리를 임명하고 크고 작은 모든 일이 그의 손을 거쳤다. 펠리페 2세는 관절염이 심한 다리를 작은 의자에 올려놓고 매일 첩첩이 쌓인 조서와 명령서에 그의 화려한 사인을 그려 넣었다. 그는 왕실 비망록을 참고해 중요한 국가 정책을 결정했는데, 지나치게 신중해 빨리 결정을 내리지 못할 때가 많았다. 이 때문에 본래 꾸물거리기로 유명한 정부 기관 일 처리는 더욱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찡그린 이마와 대리석처럼 차가운 손은 펠리페 2세를 접견하러 온 많은 신하에게 두려움을 더해 주었다.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펠리페 2세가 오랫동안 스페인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그가 다스린 제국은 근본적으로 스페인과 닮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베리아반도의 사람, 경제, 열정, 편견 면에서 볼 때 당연히 주도적 위치에 서 있었다. 그의 지위와 역할은 카스티야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그가 국정을 처리하면서 보여준 잔혹하고 거만하며 비타협적인 봉건사회 지도자적 성향이 바로 그것이다."


가톨릭과 마녀사냥

 펠리페 2세 집권 초기 몇 년간 겉으로는 평화로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스페인 내부에서는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강력한 가톨릭 회복 운동이 싹트고 있었다. 그리고 펠리페 2세 자체도 매우 광신적인 가톨릭 수호자였다. 스페인에서는 페르난도 국왕과 이사벨 여왕 시대에 처음 종교재판소가 세워졌는데, 이것은 이후 스페인 사람들의 정신과 일상생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가장 악명 높은 수도사 토르케마다는 가톨릭 국가가 제정한 법률에 따라 스페인 각 대도시에 종교재판소를 설치했다. 그리고 스스로 최고권위직인 종교재판소 소장을 맡았다. 그가 만든 법령으로 이후 350년간 3만 5,000명이 불에 타 숨졌다. 또한 이 법령에 의해 2만 명 이상이 잔혹한 형벌을 받았다. 노역에 시달린 수감자가 29만 명, 시민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이 20만 명, 제국 밖으로 추방당한 사람은 500만 명에 육박했다.

 스페인은 화형식을 성대한 축제로 여겼다. 수많은 왕족과 귀족들이 축하 행사에 참여해 이교도들의 화형식을 즐겼다. 1559년에만 다섯 차례 화형식이 있었는데, 그중 3번은 펠리페 2세가 직접 주관했으며, 각국의 사절단, 왕족, 귀족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고 한다. 펠리페 2세는 종교재판소가 설치된 궁전의 대형 홀에서 파티를 즐기며 창문 너머로 마녀를 불태우고 있는 장작더미 쪽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또 그는 가끔 매우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는데, 갑자기 끼고 있던 검은 장갑을 찢으며 사형 집행인에게 "빨리 유황 도화선을 마녀의 손가락에 끼워라!"라고 소리 질렀다.

 펠리페 2세 입장에서는 정치적 통일이 곧 종교적 통일이었다. 그는 내란을 방지하기 위해, 또 스페인과 기타 지역의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화형식을 대대적인 축제로 만들어 국민들에게 광기에 가까운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마녀의 영혼을 불태울 때마다 가톨릭 스페인이 구원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스페인은 정치적으로는 통일 국가였으나,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이교도가 존재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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