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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포르투갈&스페인

[포르투갈&스페인] 아메리카와 돈키호테 저자, 세르반테스 이야기

by 티제이닷컴 2024.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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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로운 땅 아메리카

 아메리카로 영토를 확장한 이베리아반도의 세력은 두 개였다. 하나는 남아메리카 브라질을 통치한 포르투갈, 그리고 남쪽으로 아메리카 최남단 티에라델푸에고에서 북쪽으로는 오늘날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 더글러스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점령한 스페인이다.

 아메리카 정복 활동의 1단계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의해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반에 완성되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이 기간 내내 특별히 이들을 주시했고, 그중에서도 스페인의 종교박해와 봉건적 식민 통치는 시선을 끌었다.

 이 시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누린 풍요로움은 대부분 아메리카 원주민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인디언이란 이름은 인도에서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것은 콜럼버스가 자신이 인도에서 멀지 않은 일본 혹은 중국 근처에 도달했다고 착각했던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인디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가 도착한 곳은 인도도 중국, 일본도 아닌 아메리카 신대륙이었다. 스페인이 식민지에 도입한 통치 시스템에는 본국과 기타 유럽 나라의 보편적인 시스템의 기초 위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고유한 관습이 어우러져 있었다. 이러한 독특한 시스템은 이후 수백 년간 아메리카 정치와 경제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식민지에서 수입해 오는 상품은 조금 차이가 있었다. 스페인이 식민지에서 수입해 오는 상품은 주로 금은 보석류였고, 포르투갈은 열대 목재와 설탕이 주된 상품이었다. 후에 두 나라의 식민지 수입 품목은 조금씩 변했다. 브라질 내륙에서 금광이 발견된 후 포르투갈로 끊임없이 황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반면, 스페인은 중앙아메리카 쿠바와 멕시코 지역에서 생산한 설탕과 담배를 수입했고, 에콰도르에서는 카카오를 수입했다.

 이러한 상품들은 대부분 유럽 시장에서 매우 인기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벌어들인 돈은 제국을 지키기 위한 군사비용, 황실과 귀족들의 일상적인 과소비로 금방 바닥이 드러나고 말았다. 짧은 시간에 막대한 재산가가 된 지주, 상인, 노예 상인들로 인해 지금도 단시간 내에 큰돈을 번다는 뜻으로 '아메리칸드림'이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다.


황금시대의 대문호

 그들은 대부분 커다란 모순에 휩싸여 있었다. 새로운 시대를 열 훌륭한 걸작을 만들어냈지만, 현실은 매우 고달팠다. 명예는 있되 부는 없는 상황이었다. 비록 사후에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지만 생전에 그들은 마음 놓고 돈을 써본 적이 없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돈키호테'의 저자로 유명한 세르반테스이다. 세르반테스는 많은 작품을 썼고 대중적으로도 매우 인기가 있었다. 특히 그의 희곡은 당대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후반부 인생은 매우 궁핍했으며, 결국 무일푼으로 세상을 떠났다. 수많은 스페인 귀족과 외국의 고위 관리들이 그의 작품을 읽었지만, 세르반테스가 품위 있게 인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군인 세르반테스

 일반적으로 세르반테스의 작가 이력은 잘 알려졌지만, 그의 군 경력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세르반테스는 20살 무렵 이탈리아 나폴리 군대에 들어갔다. 그 후 다른 군대로 옮겼고, 1561년 일어난 레판토 해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은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지중해로 나오는 것에 불안해했다. 그래서 교황은 스페인, 제노바, 베니스를 주축으로 신성 동맹군을 조직했고, 세르반테스가 바로 이 군대에 속해 있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다친 스페인 병사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세르반테스도 예외일 수 없다. 그는 가슴에 총상을 입었고 왼손을 쓸 수 없게 됐다. 그는 이탈리아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길에 불행히도 해적들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는 알제리에서 6년간 노예 생활을 하다가 가족과 국가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세르반테스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정부 기관에 취직했다. 스페인 지방을 돌아다니며 세금을 거두는 일이었다. 이때 세르반테스는 세비야 등에서 수많은 부패 행위를 목격했다. 그는 부패 관리를 고발했다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그는 이때 옥중에서 수많은 명작을 만들어낸 것이다.

세르반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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