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나라, 하나의 왕국
1500년대 말 포르투갈은 해외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일하지 않는 중산층을 양산했다. 반면 농민들의 삶은 고달팠다. 교회 지주와 귀족 지주들은 도시에서의 과소비를 유지하기 위해 농민들을 더욱 핍박했다. 귀족들은 막대한 재산을 쌓았으나 발전적인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오직 편안하게 즐길 생각만 했다.
당시 포르투갈을 방문한 한 외국인 전도사는 "이곳 사람들은 어떤 고통과 굴욕을 참아낼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절대 기술을 배우려 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육체노동이란 흑인과 무어인의 몫이며 배경만 있으면 힘든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하지 않는 중산층은 국가와 다른 계층의 피를 빨아먹으며 점점 더 거대해졌다. 결국 그들은 포르투갈 경제의 몰락을 가져온다.
1580년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합병한다. 그럼으로써 포르투갈의 동방 제국, 아프리카 식민지, 브라질 등이 스페인 펠리페 2세의 소유가 되었다. 이로써 스페인의 기존 유럽 영토, 아시아와 아메리카 식민지와 포르투갈의 영토가 합해져 세계 최초로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을 탄생시켰고, 이때 스페인 역사상 최고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스페인의 포르투갈 합병은 스페인의 용의주도한 계획과 적절한 시기를 이용한 결과물이었다. 또한 급변하는 포르투갈 사회와 국운의 쇠퇴로 빚어진 것이기도 했다. 결국 포르투갈은 60년 후 다시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스페인의 속국이라는 불명예를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포르투갈의 쇠락
포르투갈의 쇠락은 1580년에 이미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먼저 포르투갈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던 향료 무역이 일련의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처음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포르투갈은 동방에서 아라비아 상인들의 무역네트워크를 무너뜨리고 동방 항로를 장악함으로써 향료 무역을 독점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동방에서 향료를 구매할 때 대부분 현금으로 거래하거나 물물교환 방식을 이용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유럽의 상품을 가져다가 동방에서 향료와 물물교환을 했는데, 당시 아시아에서 필요로 하는 유럽 상품은 구리, 아연, 수은, 은, 그리고 옷감 등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포르투갈에는 이러한 자원도 없었고 포르투갈인들은 이런 상품을 만들 생각도 안 했다. 결국 방법은 다른 나라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 오는 것이었다. 당시 동방으로 가는 상선의 운송장을 보면 제노바의 무명 벨벳, 피렌체의 붉은 비단, 런던의 면직물, 네덜란드의 리넨 등이 실려 있었다. 즉, 다른 나라의 산업은 발전시켜 주며, 자국의 산업은 방치한 꼴이니, 포르투갈의 쇠퇴는 시간문제였다.
향료 무역의 종착지는 리스본이 아니었고, 유럽의 향료 집산지는 안트베르펜이었다. 북유럽 국가와 무역 거래를 하기 위해 포르투갈은 안트베르펜에 상관을 설치했다. 포르투갈의 배들은 이곳에서 동방 무역에 필요한 유럽의 옷감을 외상 거래하고 나중에 향료를 싣고 돌아와 값을 지불했다. 이러한 외상 거래의 이자는 연이율 25퍼센트로 상당히 높았다. 더구나 동방 항로가 매우 길었기 때문에 금방 돈을 갚을 수도 없었다.
이렇게 하다 보니 포르투갈의 외채는 계속 늘어났고, 1524년에 포르투갈의 빚은 300마라베디에 달했다. 향료 무역에 들어가는 비용은 갈수록 증가했다. 포르투갈은 동방 항로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해야 했고, 현지 부락과의 동맹을 유지하는 데도 막대한 비용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또한 인도까지 항해하는 도중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특히 항해 도중 선원들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당시 동방 항로를 여러 차례 왕복했던 선원의 말에 의하면 그와 함께 포르투갈에서 출발한 선원 4,000명 중 다시 돌아온 사람은 2,000명도 안 되었다고 한다. 이 중 대부분은 항해 도중 죽었고, 일부는 인도에 도착한 후 현지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병에 걸려 죽었다. 또 일부는 아예 동방에 정착하기도 했다.
매년 부활절에 리스본을 떠난 함대는 인도에 도착한 후 먼저 유럽에서 싣고 온 화물을 내린다. 그리고 포르투갈 상관에서 미리 구매해 놓은 향료를 배에 싣는다. 이때 배에 실리는 후추는 51킬로그램에 3마라베디인데 여기에 인도에 오기까지 들어간 비용과 인도와 리스본에서의 창고비, 운송비, 선박 감가상각비가 더해져 리스본에 도착한 후에는 17마라베디가 된다. 무역회사에서 이것을 도매로 팔 때 가격은 33마라베디였다. 매년 포르투갈로 수입되는 향료는 200만 킬로그램이 넘었다. 그러나 유럽에 들어오는 동방 향료의 양이 증가하면서 향료 값은 하락하기 시작했다.
또한 원래 향료 무역을 했던 이탈리아 도시 상인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얼마 후 이들은 홍해 아라비아를 거치는 옛 무역로를 이용해 향료 무역을 재개했으며, 이때부터 유럽 시장에는 향료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들은 포르투갈에서 수입하는 향료는 오랜 기간 바다로 운송되기 때문에 쉽게 변질된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이 시기부터 유럽인들에게는 향료를 선택할 수 있는 향료 선택권이 생겼으며, 이것은 포르투갈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다.
포르투갈의 향료 무역 수입이 이제 더 이상 지출을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은 국민의 힘을 빌려 빚을 갚기 위해 1528년 연이율 6.25퍼센트의 국고 채권을 발행했다. 이것으로 연이율 25퍼센트가 넘는 외채를 갚아나갔다. 16세기 중엽 포르투갈 정부의 국공채발행액은 외채의 4배가 넘었다. 그동안 포르투갈이 쌓아놓은 돈은 모두 외국으로 빠져나갔고 동방 무역은 포르투갈을 점점 더 가난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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