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추락
포르투갈이 다른 유럽 국가의 제품으로 동방 무역을 해온 결과로 영국, 네덜란드 등 기타 유럽 국가들은 상공업을 빠르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포르투갈이 안트베르펜에서 공산품을 대량 구매하면서 유럽 공산품 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또한 향료 무역으로 큰돈을 번 포르투갈의 부자들은 생활 수준이 높아지자 계속해서 온갖 사치품을 사들였다. 포르투갈 부자들은 무기에서부터 종이, 가구, 예술품, 양탄자, 식품, 말, 수레, 선박, 화려한 실내 장식을 위한 타일, 서적, 모피, 향수 등 없는 것 없이 다 갖추어 놓고 살았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국내 공업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향료 무역을 독점한 100년 동안 포르투갈의 공업 생산능력은 13세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포르투갈에는 여전히 대장간, 도자기나 벽돌 굽는 가마, 수직기로 짠 광목, 신발 제조, 말 장신구 제조, 삼베 등 단순한 생산품뿐이었고, 이것은 겨우 농촌과 도시 평민들의 수요를 만족시킬 뿐이었다. 나머지 도시 생활에 필요한 일상품들은 대부분 수입에 의존했다. 이것이 바로 후에 영국과 네덜란드가 자신의 공산품을 무기로 포르투갈 함대를 이길 수 있었던 원인이다.
네덜란드와 영국은 포르투갈이 그들이 만든 제품을 향료 무역의 매개물로 이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 스스로 함대를 이용해 포르투갈의 동방 무역 거점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의 순례
1533년 포르투갈의 에보라에서 새로운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연극 제목은 '상처 입은 사람들의 순례'로 당시 최고의 극작가 질 비센테의 작품이다. 이 희곡은 매우 독특한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 순례 행렬에 끼어 있는 인물들이 돌아가며 무대에 오른다. 인물 하나하나는 당시 포르투갈 계층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처음 무대에 오르는 인물은 농민이다. 그는 무대에 올라 이렇게 말한다. "생명의 탄생은 한순간인데 내 죽음은 왜 이렇게 긴 거야?" 포르투갈은 해외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농촌에는 그 혜택이 전혀 미치지 않았고 오히려 그로 인한 부작용만 돌아왔다. 교회와 귀족 지주들은 도시에서의 과소비를 유지하기 위해 농민들을 더욱 핍박했다. 이들은 농민들의 경작지에서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농민들은 과도한 세금 때문에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짓는 일이 힘들어지자 도시의 풍요로움을 동경해 도시로 몰려들었다. 1521년에는 포르투갈에 기근이 발생해 더 많은 농민이 농촌을 떠나 리스본으로 향했지만 많은 이들이 도중에 굶어 죽었다.
한편 계속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흑인 노예들과 경쟁하느라 더욱 힘겨웠다. 1541년 매년 1만 명이 넘는 흑인 노예가 포르투갈로 들어왔고 그들은 농사를 비롯한 중노동을 도맡았다. 포르투갈 농민들은 이제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교회로 들어가든지, 왕실의 시종이 되든지, 바다로 나가는 것이었다. 당시 많은 농민과 빈민들이 출세를 위해 교회로 들어갔다. 당시 교회는 교회에 딸린 토지를 농민들에게 빌려주고,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16세기 후반, 포르투갈 수도원은 200개에서 400개까지 늘어났고 교회에 적을 둔 사람의 수도 급증했다. 농촌의 소규모 자작농들이 줄지어 파산하면서 그들의 농장과 논밭은 항해 탐험으로 부자가 된 귀족, 관리, 모험가들의 투기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앞다퉈 토지를 사들였고, 자작농들은 갈수록 더 힘겨운 상황으로 내몰렸다.
도시에는 해외 영토 확장으로 갑자기 큰돈을 번 사람들이 모이면서 새로운 국가기관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따라서 관리의 수도 급증하고 왕실 관리 인원도 주앙 1세 때 200명에서 마누엘 국왕 때 이미 4,000명으로 늘어났다. 이 100년 동안 포르투갈의 고위 관리들이 거느린 하인 수도 대략 비슷했다고 한다. 귀족들은 막대한 재산을 쌓았으나 발전적인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오직 편안하게 즐길 생각만 했다. 도시 중산층들의 꿈은 오로지 왕궁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매년 수천 명의 청년들이 리스본으로 몰려와 자신을 고용해 줄 귀족과 귀부인을 찾아 헤맸다. 당시 포르투갈을 방문한 한 외국인 전도사는 리스본의 사회 분위기와 놀라움에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는 "이곳 사람들은 어떤 고통과 굴욕을 참아낼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절대 기술을 배우려 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비센테의 연극은 항해 대발견으로 35년간 빠르게 막대한 부를 축적한 포르투갈의 실상을 보여주었다. 포르투갈 해외 영토 확장의 결과는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해외로부터 들어온 막대한 부는 일하지 않는 중산층을 양산했다. 이들은 국가와 다른 계층의 피를 빨아먹으며 점점 더 거대해졌다. 결국 그들은 포르투갈 국내 생산의 대동맥을 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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