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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포르투갈&스페인

[스페인, 포르투갈] 두 개의 나라, 하나의 왕국

by 티제이닷컴 2024.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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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펠리페 2세 vs 포르투갈 안토니오, 왕위 다툼

 1579년에 열린 의회에서는 교회, 귀족, 평민 대표 10명이 모여 왕위 계승 문제를 협의했다. 그러나 이 의회에서 결론을 내기 전에 엔리케 국왕이 먼저 죽었다. 엔리케는 누구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5명의 총독이 모여 임시로 대리 통치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중 절반 이상이 이미 펠리페 2세에게 매수당한 상태였다. 이때 포르투갈과 스페인 국경 지역에서는 스페인 군대가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 국민들에게 무력으로 침입했다는 이미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의 바람과는 달리, 그의 경쟁자가 성급히 행동을 개시했기 때문에 펠리페 2세도 서둘러 군대를 움직였다.

 클라투 수도원 원장 안토니오는 국민에게서 강력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1580년 6월 과르다 주교가 설교하는 중에 안토니오를 포르투갈 왕국의 수호자라고 표현했다. 이에 국민들은 그를 열렬히 지지하기 시작했고 누군가 손수건을 묶은 보검을 올리며 안토니오를 포르투갈 국왕으로 옹립한다고 선언했다. 며칠 후 안토니오가 리스본에 도착하자 스페인 연합 왕권을 주장했던 귀족들은 서둘러 도망쳤다.

 이들은 세투발에 모여 있다가 안토니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포르투갈을 떠나 밤새 배를 타고 스페인에 도착했다. 여기에서부터 스페인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스페인 땅에서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의 합법적 국왕임을 선포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동시에 안토니오를 반란군으로 공표했다.

 스페인 군대는 곧바로 국경을 넘어 포르투갈로 진격했고 별다른 저항 없이 포르투갈을 점령했다. 안토니오는 군대를 모아 저항하려 했으나, 그를 따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안토니오는 겨우 흑인 노예들을 모아서 군대를 조직했다. 그는 리스본 부근에서 스페인에 맞섰으나 참패했다. 당시 아조레스 제도에 있던 그의 부하 역시 전투에서 패하고 포로가 되어 스페인 군대에 의해 처참히 살해되어 바다에 던져졌다. 왕권 계승에 실패한 안토니오는 어쩔 수 없이 포르투갈을 떠나 프랑스와 영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영국에 지원군을 요청하며 브라질을 영국에 양도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펠리페 2세, 포르투갈을 차지하다

 펠리페 2세가 드디어 포르투갈에 입성했다. 1581년 4월 토마르에서 열린 궁정 회의에서 펠리페 2세는 정식으로 포르투갈 국왕으로 인정받았다. 이 회의에서 펠리페 2세는 전 국왕 엔리케와 비밀 회담 시 결정했던 조례들을 발표했다. 그는 포르투갈 의회가 포르투갈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했고, 포르투갈에 있는 기존의 모든 권리, 자유, 법률을 침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왕실의 특별한 요구가 없는 한 포르투갈 내 모든 총독과 지방 관리 및 주요 고위 관직에 반드시 포르투갈인을 임명할 것을 약속했다. 교회의 주요 직책도 마찬가지였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식민지는 각각 분할 통치하고 각자 관리를 파견하기로 했다. 두 나라의 화폐제도도 계속 각각 유지했다. 포르투갈의 법률문제는 반드시 포르투갈 내에서 심판하도록 했다. 펠리페 2세가 어디에 있든 6명의 포르투갈인으로 구성된 참의회에서  포르투갈 관련 사무를 처리하도록 했다. 펠리페 2세는 양국이 단지 하나의 왕국으로 불리는 것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펠리페 2세의 공약에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항이 빠져 있었다. 포르투갈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을 스페인이 필요로 하는 일에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과 포르투갈의 군대를 스페인을 위한 전쟁에 이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문제로 인해 스페인이 약속한 모든 조항은 사실상 무의미해졌다. 이러한 통치가 60년간 지속되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

 포르투갈은 명분상 스페인의 형제 국가였으나 점차 스페인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양국 관계의 발전 방향을 살펴보면 처음 1580년에서 1620년까지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포르투갈은 정치적으로 안정되었고 경제 상황도 많이 개선되었다. 스페인이 동방 무역에 필요한 해군 비용을 대신 부담해 주었고 포르투갈에 많은 교회가 신축되었다.

 하지만 1620년에 이르자 스페인의 아메리카 은광이 고갈되고 오랫동안 이어온 전쟁으로 스페인의 전쟁이 바닥나고 말았다. 이때부터 스페인은 포르투갈 국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고 포르투갈 국민들은 스페인의 폭정에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혼란 상황은 포르투갈이 독립하는 1640년까지 계속되었다.

 포르투갈이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을 겪고 있을 때 펠리페 2세는 이미 포르투갈의 전반적인 상황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후 펠리페 2세는 리스본 왕궁에서 광활한 대서양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야심을 드러냈다. 그는 포르투갈을 이어받음과 동시에 포르투갈이 가지고 있는 광활한 세계의 품으로 들어갔다. 이미 지중해 세계는 그의 지배하에서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펠리페 2세의 정복 대상은 이때부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포르투갈 합병으로 펠리페 2세는 세계 역사상 누구도 가져보지 못한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펠리페 2세의 제국은 아시아의 향료제도, 필리핀, 인도에서부터 아프리카 해안과 내륙의 점령지 그리고 아메리카 전체에 달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해 그어진 경계선은 이미 무의미해졌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양국이 100여 년 가까이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정복한 세계가 이때에 이르러 한 사람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영토 대부분이 유럽 대륙에 제한되어 있던 아버지 카를 5세에 비해 펠리페 2세는 훨씬 더 빛나는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이것은 세계 역사상 최초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었다.

 펠리페 2세가 정복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신중함, 성실함, 인내심은 스페인으로 하여금 황금시대를 누리게 했다.

스페인 제국 최대 영토
포르투갈 합병 후 스페인 제국 최대 영토. 이 당시 스페인은 해가지지 않는 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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