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식민 통치 방식
18세기 영국의 식민 통치는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처럼 강압적이진 않았다. 영국은 북아메리카와 카리브해의 식민지에서 대부분 선거를 통해 식민지 정부를 구성했다. 따라서 런던 정부의 간섭은 제한적이었다. 반면,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중앙집권적 관리방식을 통해 식민지를 지배했다. 18세기뿐 아니라 19, 20세기에 걸쳐 영국이 거대한 식민제국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영국 정부가 식민지 정부에 좀 더 많은 책임과 권리를 부여해 불만을 조금이나마 더 줄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영국의 영향력 확대 및 제국의 성장
7년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급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가 캐나다에서 쫓겨나다시피 하면서 북아메리카도 영국인의 수중에 들어갔다. 아프리카에서도 영국과 영토분쟁을 하던 프랑스는 겨우 몇 개 지역만을 남긴 채 물러났다. 카리브해에서 영국은 서인도 제도에 있는 대부분의 섬을 점령했고, 스페인의 하바나 지역도 빼앗았다. 하지만 영국은 이듬해 이 땅을 스페인의 플로리다와 교환했다.
7년 전쟁으로 영국의 지위는 크게 올라갔다. 이 전쟁은 유럽 전체의 외교 판도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스페인과 프랑스는 더 이상 영국의 역량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영국과 또다시 전쟁을 벌인다면 자국의 주요 영토를 잃을 각오를 해야 했다. 이때부터 영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세계 제국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영국인은 유사 이래로 처음 스스로를 세계 강대국으로 부를 수 있는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대영제국은 하나의 무역제국이었다. 영국이 식민지를 점령한 이유도 바로 무역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은 제품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리고 식민지로부터 공업제품의 원료를 얻어내기 위해서 북아메리카에 앵글로·색슨족의 영토를 확대해 나갔다. 18세기에 영국은 커피, 설탕, 목화 등 주요 생산품의 재수출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후의 영국 경제
1815년에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영국 경제는 엄청나게 발전했다. 이는 바로 전쟁 덕분이기도 했다. 전쟁 동안 영국 본토는 아무런 피해도 보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패배하여 결국 영국해협을 건너지 못했다. 이는 영국의 산업과 무역이 프랑스의 위협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발전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영국과 비슷한 시기에 산업혁명을 시작했던 유럽 대륙의 다른 나라, 즉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등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파괴되고 말았다. 이때에도 영국은 군복과 총, 기타 군수물자를 제공하는 방법으로 전쟁에 개입했기 때문에 전 유럽 대륙이 사실상 영국의 소비자였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유일무이한 산업 대국으로 성장해 있었다.
웰링턴 공작과 넬슨 제독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영국의 영웅들이다. 웰링턴은 프랑스와의 워털루 전투를 영국의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지만 넬슨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웰링턴은 후에 영국 총리를 지내면서 종교와 선거 등의 문제에서 보수적인 태도를 취했기에 영국 국민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넬슨은 영국을 수호한 상징적 인물이자 영국 해군의 자랑이었다. 그는 세 차례의 결정적인 승리를 끌어냈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영국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리고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영국 해군의 최고 영웅으로 떠올랐다.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또 그 명예를 얻었을 때 죽음을 맞이한 넬슨은 오늘날까지도 영국의 국가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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