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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영국

[영국]#45_유럽내 전쟁을 통해 프랑스를 견제하다

by 티제이닷컴 2024.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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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킨스 귀 전쟁


 때로 전쟁은 상상을 뛰어넘는 해괴한 이유나 사소한 일에서 촉발되기도 한다. 강대국 간의 전쟁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때마침 발생했다.

 1738년 의회가 개회 중일 때, 로버트 젠킨스라는 영국 선장이 하원을 찾아왔다. 그는 잘린 귀가 담긴 병을 꺼내 보이며 1731년에 스페인 경비대에 나포되었을 때 귀를 잘렸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의회가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정의를 실현해 줄 것을 청원했다.

 젠킨스 선장은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선서했지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젠킨스의 출현은 영국 의회의 반스페인 정서에 불을 지폈다. 정권을 잡고 있던 휘그당 당수 로버트 월폴은 여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영국 군함을 지중해로 파견했다. 영국은 강경한 입장을 표출함과 동시에 의회 내 반대파의 입김을 사전에 차단했다.

 1739년 10월, 결국 오랫동안 쌓여온 갈등이 이른바 '젠킨스의 귀 전쟁'으로 폭발했다. 영국인은 그동안 참아왔던 전쟁의 욕망을 한꺼번에 터뜨렸고, 나라 안은 온통 스페인에 대한 보복 여론으로 들끓었다.

 하지만 영국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스페인과 프랑스가 손을 잡고 영국에게 참패를 안겨준 것이다. 이에 따라 월폴은 의회의 신임을 잃어 당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영국에서는 내각 수뇌부가 의회 다수의 신임을 잃으면 사퇴해야 하는 선례가 생겨났다.

 영국인들은 곧 혼란을 수습하고 냉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지속할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자 전쟁을 바로 종결지었다. 냉철한 현실감각과 판단으로 영국인은 전쟁의 주적이 스페인이 아닌 프랑스임을 알고 있었다. 전쟁의 주요 원인이 젠킨스의 귀가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이번 전쟁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또 다른 도박을 결정했다.



유럽 대륙의 전쟁, 프랑스로부터 식민지를 빼앗을 기회로 삼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

 1740년부터 영국은 또다시 유럽 대륙의 각축전에 뛰어들었다. 이번에는 8년여에 걸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개입했다. 하지만 영국의 목적은 철저히 프랑스와의 식민지 쟁탈이었으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권 문제는 그저 구실에 불과했다.

 영국은 이번 유럽 전쟁에서 그다지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식민지를 쟁탈하는 데 모든 힘을 집중했다. 1748년, 영국과 프랑스는 다른 열강들과 함께 강화조약을 체결했지만, 양국 간에는 여전히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다. 특히 북아메리카와 인도에서의 신경전이 치열한 양상을 보였다. 그리고 이것이 이후 7년 전쟁의 복선이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토전사 오스트리 왕위계승전쟁

 


7년 전쟁(1756~1763)

 7년 전쟁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슐레지엔 지역을 둘러싸고 벌인 전쟁이었다. 하지만 동맹국으로 참전한 유럽 열강들은 저마다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더 많았다. 영국이 7년 전쟁에 참전한 것은 북아메리카와 인도에서 프랑스를 압도하기 위한 식민지 쟁탈전의 일환이었다.

 1756년, 오스트리아가 먼저 전쟁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오스트리아 여왕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로이센에 빼앗긴 슐레지엔 지방을 탈환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유럽의 모든 열강은 재빨리 수지타산을 맞추어보고 이득이 되는 쪽으로 줄을 서서 참전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가 예전의 적이었던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자 영국은 망설임 없이 프로이센과 손을 잡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지난 전쟁에서 화의를 맹세했지만, 기회만 되면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르고라도 상대를 쓰러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7년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영국은 건질 것도 별로 없는 이 전쟁을 위해 유럽 대륙에 전력을 쏟아부을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더 큰 이득을 가져다줄 유럽 이외에 지역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반면, 프랑스는 이 전쟁에 총력을 다했고, 이 두 국가의 상반된 판단은 전 세계적으로 향후 역사에 영향을 미쳤다.

 

토전사 7년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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