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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1_일본의 개국, 구로후네의 위협

by 티제이닷컴 2023.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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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끌고 온 검은 선박 4척이 완전무장을 한 채 일본의 문을 두드렸다. 이를 계기로 아시아 극동에 있던 섬나라 일본은 운명을 달리하게 된다. 그로부터 50년 후,  일본은 아시아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세계 강대국 대열에 오른다.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고 100년이 지난 1968년, 일본은 세계 제3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Intro


 18세기 말부터 서양의 군함들이 일본에 자주 출몰했고, 그로 인한 풍랑은 일본이란 동양 변방의 섬 국가를 점점 옥죄었다. 가장 먼저 일본을 충격에 빠뜨린 건 러시아였다.

 19세기에는 영국과 미국이 일본의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했다. 1808년 영국 군함이 네덜란드 국기를 걸고 나가사키 항으로 들어왔다. 당시 나가사키 부교였던 마쓰시다로 야스히데는 막부 관리를 파견해 네덜란드 상관의 직원과 함께 영군 군함을 맞이하도록 했으나, 그들이 군함에 억류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마쓰시다로는 서둘러 사가 번의 사병들을 불러 영국 선박의 귀로를 차단하려 했지만 여의찮았다. 영국 선박이 유유히 떠난 후, 결국 그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 1838년, 일본 유민을 실은 미국의 모리슨호가 사쓰마번(지금의 가고시마)에서 포격을 받아 일본 유민들이 조국으로 귀환하지 못하자, 이에 따라 텐포연간(1830~1844)에 개혁이 실시되었으며, 1840년에는 영국이 청나라를 상대로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동아시아의 질서를 관리하던 청나라의 어이없는 패배를 목격한 일본은 서유럽 열강들이 곧 자국에도 개항을 요구하고 나설 것으로 예상하며 잔뜩 긴장했다.


 구로후네(검은 배)의 위협



 가에이 6년, 1853년 7월 8일 오후, 에도 만(지금의 도쿄만) 우라가 항의 선박 관리 기관인 우라가 부교쇼(무가 시대 행정 관청)의 근무자가 나른함에 감기는 눈을 억지로 치켜뜨며 강렬한 태양 빛에 반짝이는 잔잔한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먼 수평선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 그림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검은 선박 4척이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맹렬한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곧장 순찰원한테 통보했지만, 거대한 선박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구로후네('검은 선박'이라는 의미로 당시 서양의 배를 일컫는 표현)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우라가 부교쇼에 처음 전해진 그 시간, 4척의 구로후네는 이미 우라가항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 1720년 우라가 부교쇼가 우라가 항으로 이전해 온 후, 모든 선박은 반드시 검문을 거쳐야만 이곳의 통과가 가능했다. 그런데 온통 시커멓게 칠한 4척의 선박이 엄청난 위압감으로 밀고 들어오자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놀라움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들은 작은 배를 저어 구로후네에 가까이 다가가 네덜란드어로 배 위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작은 배에 탄 사람이 협상 책임자인 부총독이라 밝히자, 구로후네에 오르는 것을 허락했다.

 이 4척의 구로후네는 미국 동인도 함대의 사령관이었던 페리 제독이 있었다. 일본에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당시 미국은 해외로의 세력 확장에 적극적이었다. 1844년 청나라와 왕샤 조약(아편전쟁에 의해 영국과 난징조약을 체결한 이후 미국과 청나라가 체결한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고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더니 1846년에는 오리건주를 손에 넣고 태평양 건너편으로 손을 뻗기 시작했다. 또한 1848년에는 캘리포니아주에서 금광이 발견돼 서부 대개발이 착수했다. 태평양에 접해있는 지리적 요건과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라는 사상이 미국인들에게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 영국산 제품이 대량으로 수입되어 캘리포니아에서 발견된 금이 영국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던 미국에 있어 아시아와의 무역은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이었다. 

 1852년, 미국 국무원은 페리에게 일본 해역에서 좌초된 미국 선박이 식량, 식수, 연료 보급과 선박 수리의 보급 기지로 사용할 수 있는 개방된 항구를 물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페리가 이끄는 함대에는 프리깃함인 미시시피호가 포함돼 있었다. 페리는 원래 12척으로 구성된 함대로 출항하였으나, 일본에 도착하니 4척만이 남아있었다.

 구로후네가 나타난 소식은 막부에게도 빠르게 전달되었다. 수석 로주(지금의 총리에 해당)였던 아베 마사히로는 미국인이 구로후네를 몰고 와서는 미국 대통령이 막부 쇼군에게 보내는 국서를 받을 것을 요구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라가 부교에게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국서를 받은 후 돌려보낼 것을 명령했다. 그렇게 해서 7월 14일, 미국 수병 300명이 구리하마 항에 상륙했고, 우라가 부교쇼의 관리는 총독 명의로 그들로부터 푸른 백조 깃털로 장식된 국서를 받았다.

 이 사건은 페리 제독이 일본에 도착한 지 9일 만에 이듬해 봄에 다시 올 것을 약속하고 돌아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구로후네의 방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제패한 이후 200년간 쇄국을 고수하고 있던 에도 막부를 긴장시켰다. 당시 많은 일본인이 구로후네에 호기심을 가지던 반면 막부는 거의 절망에 빠졌다.

 7월 31일, 미국의 국서를 받은 지 보름이 지났을 때, 로주인 아베 마사히로가 국서를 각지의 다이묘(각 번의 번주와 제후)들에게 보내 다이묘와 막부관리들의 의견을 묻기도 했다. 이런 경우 역시 1603년 에도에 막부가 성립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막부의 지시로 그려진 '구로후네' 출처 : 나무위키 '구로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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