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말부터 서양의 군함이 빈번하게 일본 근해에 출몰하는데, 일본의 문을 두드린 횟수는 무려 52차례에 달했다. 가장 먼저 일본을 충격에 빠뜨린 열강은 러시아였다.
개항 전 여러 에피소드
1777년, 야쿠츠크 상인 레베데프가 이끄는 원정대가 홋카이도 앗케시를 압박하며, 마츠마에번과의 통상을 요구했다. 1792년 러시아 사절 락슈만이 통상을 요구하기 위해 홋카이도 네무로를 찾아왔다. 러시아의 정식 사절이 방문하자, 막부도 어쩔 수 없이 해안 방어책을 세웠다. 나아가 서양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서적을 대량 수집하기도 했다. 그 후 일본의 서구파 인사들은 린가쿠(네덜란드어를 통해 서구의 과학, 기술을 연구하고, 서구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했던 학풍) 연구에 몰두했다.
19세기에는 영국과 미국이 일본의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하였다. 1808년 영국 군함이 네덜란드 국기를 걸고 나가사키 항으로 들어왔다. 당시 나가사키 부교였던 마쓰시다로 야스히데는 막부의 관리를 파견해 네덜란드 상관의 직원과 함께 영국 군함을 맞이하도록 했으나, 오히려 군함에 억류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마쓰시다로는 서둘러 사가 번의 사병들을 불러 영국 군함의 귀로를 차단하려 했지만 영국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영국 군함이 떠난 후, 마쓰시다로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
1824년, 고래잡이배의 영국 선원이 식량을 구하고자 오쓰에 상륙했다. 이 일이 발단돼 발생한 사건이 바로 분세이 8년인 1825년에 일어난 막부의 '분세이 구축령' 선포이다. 이는 외국 선박이 일본 해안에 접근하는 것을 불허하며, 접근하는 즉시 발포해 쫓아낸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고안해 낸 것이 바로 '양이론'이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각 번은 오랑캐를 물리치기 위해 대형 선박과 대포를 만들어야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번의 세력이 커지는 걸 견제하던 막부의 정책에는 위배되는 행위였다.
1838년에는 일본 유민을 실은 미국의 모리슨 호가 사쓰마번에서 포격을 받아 일본 유민들이 조국으로 귀환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1840년에는 영국이 중국을 상대로 아편전쟁을 일으켜 일본은 서유럽 열강들이 곧 자국에도 개항을 요구할 것을 예상하며 잔뜩 긴장했다.
1844년, 네덜란드 군함 한 척이 나가사키 항으로 들어왔다. 막부도 이미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 이 선박이 네덜란드 국왕의 친서를 전달하기 위해 온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 친서에는 영국이 중국에 공격을 개시했음을 간과하지 말고, 중국과 같은 길을 걷지 말 것을 경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막부는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 앞으로는 그 어떠한 서신도 받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낼 거라고 통보했다.
페리 제독이 일본을 방문할 때도, 막부는 이미 네덜란드를 통해 페리 제독의 방문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페리의 입항은 일본 정치계를 뒤흔들었다. 로주가 국서를 받고 페리를 돌려보내긴 하였으나, 페리는 '내년 봄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다이묘들 사이에서는 현상 유지를 주장하는 세력과 소극적 개항을 주장하는 세력이 나뉘었고, 극소수만이 적극적 개항을 주장했다. 1853년 10월, 막부는 대형 선박의 건조를 금지하는 명령을 선포했다.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 속에서 막부가 강력한 쇄국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으로 막부에 대해 대형 선박의 건조 허가를 신청한 것은 도자마 다이묘가 있던 사쓰마번이었다.
1854년 2월 11일, 페리가 이끄는 군함 7척이 약속대로 다시 에도만을 찾아왔다. 이번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겠노라고 단단히 벼르고 왔기에 일본과 접촉할 수 있는 모든 통로를 이용해 교섭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 담판에서 막부는 모순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는 전쟁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면서, 대외적으로는 전쟁 준비를 이미 끝마쳤다고 선전한 것이다. 3월 8일, 요코하마에서 막부와 페리가 담판을 개시하고, 3월 21일 막부가 페리의 요구를 거의 모두 받아들임으로써 마침내 일본과 미국 사이에 친선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것이 바로 '가나가와 조약'이다. 이 조약에서 일본은 시모다와 하코다테 두 항구를 개방하고, 미국에 담수와 식량, 석탄 등을 제공하며, 양국 국민이 표류할 경우 서로 피난처를 제공해 주는 것에 동의했다. 미국은 최혜국 조항을 빠뜨리지 않고 조약에 넣었다.
요시다 쇼인(1830~1859)
4월 25일 새벽, 시모다 항에 정박 중이었던 군함 미시시피호에서 잠들어 있던 군관들이 밖에서 나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갑판으로 나가보니 두 명의 남자가 밧줄을 타고 갑판 위로 올라오고 있던 것이었다. 일본인 두 명이 승선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군관들은 그들을 페리에게 끌고 갔다. 그들은 세상을 둘러보며 견문을 넓히고 싶다며 자신들을 데리고 미국에 데려가 줄 것을 부탁했다. 페리는 일본 정부의 허가가 필요하다며, 허가를 받아오라 하지만, 그들은 일본 정부에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됐다.
이 둘은 24살의 요시다 도라지로와 25살의 사쿠마 마쓰타로였다. 요시다 도라지로가 바로 일본 근대 사상가이자 메이지 유신의 선구자인 '요시다 쇼인'이었다. 페리의 구로후네를 처음 찾아갔을 때만 해도 그는 쇄국양이파였지만, 얼마 후 개국양이를 찬성하는 쪽으로 입장을 번복했다.
그는 조선과 청나라의 영토를 점령해 유럽과 미국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손실을 충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존왕양이를 내세우며 도막유신(막부를 타도하고 개혁을 실시하자는 주장)파 인사들을 대거 배출해 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이토 히로부미도 여기에 속한다.
가나가와 조약 체결 이후
미국과의 가나가와 조약 체결이 이루어지고 몇 년간, 영국과 러시아, 네덜란드도 일본과 잇따라 친선 조약을 체결했다. 1856년, 일본은 네덜란드와 화약을 맺은 후 일방적으로 네덜란드에게 영사 재판권을 내어주었으며, 그 후 다른 열강들도 최혜국 조약을 근거로 네덜란드와 동일한 특권을 부여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220년간 유지해 온 쇄국이 막을 내리며 일본은 서양의 반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고 만다.
1854년부터 1868년에 이르는 시기를 일본 역사에서는 막부 말기라 부르는데, 이 시기에는 많은 세력이 출현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희비가 교차했고, 내우외환이 끊이질 않았다. 일본 역사의 판도가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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