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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5_사쿠라다몬 사건

by 티제이닷컴 2023.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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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세이 5개국 조약 체결 후 200년이 넘게 교토에 연금되어 있던 천황과 구게가 갑자기 일본이란 국가의 주인공이 됐다. 그들은 수많은 다이묘와 지사들의 옹호를 받으며, 조약 체결에 발언권을 얻게 되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사쿠라다몬 사건

 1860년 3월 24일 오전 8시, 에도 성에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을 때였다. 막부의 다이로(특수 시기에 설치된 막부 최고 관직, 로주보다 서열이 높다) 이이 나오스케가 60명의 호위병에게 둘러싸여 에도의 사쿠라다몬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일행이 사쿠라다몬에 도착하자, 갑자기 북소리가 울리더니 길 양쪽에 18명의 자객이 나타나 이이 나오스케가 탄 가마를 덮쳤다. 호위병들은 갑작스레 닥친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다. 자객들은 호위병들이 정신을 못 차리는 틈을 타서 이이 나오스케의 목을 베는 데 성공한다. 이 일이 바로 '사쿠라다몬 사건'이다. 18명의 자객 중 17명은 미토번 출신의 사무라이였고, 1명은 사쓰마번 출신의 사무라이였다. 이 사건은 굉장히 상징적인데, 하급 사무라이로 대표되는 도막 운동이 무장 저항 단계로 발전되었다는 걸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이 나오스케 암살 사건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결과였으며,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바로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이었다.

공포정치를 자행한 이이 나오스케


 1858년 8월 21일, 일본 주재 초대 미국 총영사 해리스가 일본 시모다에 도착해, 교쿠센지에 머물게 되었다. 그의 목적은 페리 제독이 1854년에 체결한 친선 조약에서 한층 더 강화된 통상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페리는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이용하여 일본을 압박했고, 이를 견디지 못했던 막부가 1854년에 미일 화친조약을 체결해 버렸다. 하지만 해리스는 이에 만족하지 못했다. 반드시 통상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심하고, 1858년 1월 25일부터 13차례에 걸쳐 일본과 협상을 진행한 것이다. 그 당시 중국으로 눈을 돌려보면, 애로호 사건을 빌미로 영국과 프랑스가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키던 상황이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막부는 7월 29일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의 내용 가운데 가장 불평등한 부분은 바로 미국이 일본에서 영사 재판권 및 조계권을 갖고 협정 관세율을 적용받으며 무역 최혜국 대우를 누린다는 조항이었다.

 뒤이어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도 같은 해에 일본과 비슷한 조약을 맺게 되는데, 당시 일본 연호인 '안세이'를 따서 안세이 5개국 조약이라고 통칭한다. 이 조약의 체결로 일본은 주권에 치명적 타격을 입어 거의 반식민지 상태가 된다.

 5개국과 맺은 조약은 모두 천황의 윤허 없이 체결된 것으로, 이는 다이묘와 웅번의 불만을 불러일으키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명분이었다. 번주와 막부 사이에 공공연한 갈등이 생기자, 양이론파와 개국론파 사이의 대립도 갈수록 심해졌다. 도쿠가와 나리아키를 중심으로 한 21명의 다이묘가 막부에게 조약 체결 중단을 요구하며, 조약 체결에 앞서 다이묘들과 막부에게 조약 체결 중단을 요구하며, 조약 체결에 앞서 다이묘들과 논의한 후 천황에게 윤허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이파와 존양파의 이런 주장이 결합해, 막부와 웅번의 관심이 교토에 있는 천황에게로 일제히 쏠리게 됐다.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나 사실상 200년 넘게 교토에 감금돼 있던 천황과 구게가 수많은 다이묘와 지사의 옹호를 받으며, 조약 체결에 있어 발언권을 얻게 돼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바로 이때, 또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 막부의 쇼군 계승자 문제가 불거졌다.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는 심신이 나약한 백치였다. 그래서 아베 마사히로가 수석 로주에 있을 때, 이미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아들인 요시노부를 14대 쇼군의 계승자로 간택해 놓았는데, 이에사다 모자가 도쿠가와 나리아키와 요시노부를 미워하는 바람에 후계자 간택이 밀리고 있었다. 이 이은 1858년에 웅번 개혁과 막부 보수파 사이의 투쟁으로 번져 웅변 다이묘와 막부 보수파가 각각 자기 세력에 유리한 인물인 요시노부와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쇼군 계승자로 옹립하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는 쇼군의 후계자를 둘러싼 투쟁이었지만, 사실은 막부의 독재를 유지하려는 세력과 웅번 다이묘의 정치 참여를 꾀하려는 세력 간의 다툼이었다.

 이때 후다이 다이묘 중 실력이 가장 막강했던 히코네번의 번주 이이 나오스케가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그는 막부 최고 권력자인 다이로가 되었다. 막부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다이로가 된 후 요시노부 편을 드는 막부 관리들을 모조리 파면하고, 개국파가 추진하던 모든 개혁을 중단했다. 그리고 천황의 윤허도 없이 미국과 조약을 맺고 요시토미를 쇼군 후계자로 결정했다.

 고메이 천황은 막부가 자신의 허락도 없이 조약을 체결한 소식을 듣곤 격노하기 시작했다. 불만을 표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천황의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한다. 천황은 급진파의 구게의 의견에 따라 조정의 명령을 받들지 않는 막부를 질책하는 조서를 내리는 한편, 미토번에 밀서를 보내 이이 나오스케를 몰락시키고 권력을 빼앗을 것을 요구했다. 안타깝게도, 미토번은 그럴 만한 용기도, 실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때 이이 나오스케는 정적들을 일망타진 하기 위해 더욱 강력한 혹정을 실시했다. 1858년 10월부터 '안세이 다이고쿠'라는 대탄압을 전개했다. 막부에 반기를 든 구게와 다이묘들은 하옥, 파면되거나 억지로 승려가 되기도 했다. 웅번의 가로들은 처형 또는 할복을 명 받기도 하였고, 외딴섬으로 유배 보내지기도 했다. 애국지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사이고 다카모리는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으나 구조되어 오시마로 귀양을 가야 했다. 또한 요시다 쇼인은 참수당했다. 이 사건으로 100여 명은 감옥에 갇혔고, 그중 25퍼센트가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이 나오스케가 자행한 공포 정치의 끝에는 앞서 말한 사쿠라다몬 사건으로 마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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