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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7_존왕양이 사상과 막부의 몰락

by 티제이닷컴 2023.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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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0년대 당시 일본 전역에서 외국인에 대한 분노가 들끓고, 외국인에게 저항하는 사건이 빈번히 일어났다. 1862년 9월 14일, 사쓰마번 번주의 후견인인 시마즈 히사미쓰는 양이에 관한 조정의 의지를 막부에 전달한 후 에도를 떠나 귀로에 올랐다. 

 외국과 갈등한 일련의 사건들

 그런데 그의 일행 700여 명이 요코하마 부근 나마무기촌에 다다랐을 무렵, 4명의 외국인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그들은 요코하마에서 수출업을 하는 영국인 리처드와 그 회사 직원 클라크, 그리고 홍콩에서 활동하던 영국인 상인 부부였다. 히사미쓰 일행이 길을 모두 점거하고 행진하자, 이 네 명의 영국인은 가던 길을 멈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영국인 부인이 타고 있던 말이 무언가에 놀랐는지 갑자기 히사미쓰 일행을 향해 돌진하였다. 그러자 히사미쓰의 부하가 곧장 칼을 빼 들고 리처드를 단칼에 살해하고, 다른 두 명에겐 중상을 입혔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사쓰마번은 히사미쓰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영국인들이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히사미쓰 일행의 행동은 그 당시 외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1863년 막부는 여론의 압력에 못 이겨 양이 정책을 펼치기로 결정한다.

 1863년 1월, 다카스기 신사쿠와 이토 히로부미는 에도에 건설 중이던 영국 공사관을 부수고, 조슈번에서 하급 사무라이와 농민, 시민으로 구성된 기병대를 조직했다. 5월 10일 저녁, 구사카 겐즈이가 이끄는 조슈번의 양이파가 시모노세키 해협에 정박해 있던 미국 상선, 프랑스와 네덜란드 군함에 포격을 가했다. 그러자 미국과 프랑스 양국의 함대가 곧장 보복에 나섰다. 7월 16일, 미국 군함이 조슈번의 배 3척을 침몰시켰고, 조슈번의 포대에는 무자비한 포격을 가하였다. 7월 20일에는 프랑스 군함이 250명의 병사를 해안에 상륙시켜 여러 곳의 포대를 점령하고 민가에 불을 질렀다. 조슈번 병사들이 한 사람당 70여 차례 총을 쏘기도 했지만, 단 한 명의 프랑스 병사도 사살하지 못하고 되레 큰 손해만 입었다.

사쓰에이 전쟁

 조슈번에서 전투가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영국은 나마무기촌 사건을 빌미로 7척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가고시마로 보내 사쓰마번과 격전을 치렀다. 이 전투에서 영국 군대는 사쓰마번의 포대와 가고시마의 도로를 거의 다 파괴한다. 사쓰에이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은 사쓰마번이 패배하며 끝이 났다.

조슈번 vs 막부, 사쓰마번 연합군

 이 같은 양이파의 행동은 막부를 곤경에 빠뜨렸다. 막부와 웅번 다이묘 사이의 갈등은 점점 심화되었고, 두 세력은 천황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한 경쟁을 한다. 1864년, 조슈번이 군대를 일으켜 교토로 진격하고, 8월 18일 구사카 겐즈이도 병사 2,000여 명을 이끌고 교토에 공세를 퍼붓는다. 이때 막부와 사쓰마 등의 병력은 7만에서 많게는 8만 명까지 이르렀다. 이 전투로 교토의 가옥 2만여 채가 포격에 파괴되었다. 조슈번 병사들이 황궁의 하마구리고몬을 밀고 들어가 막부 병사들과 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병력 차이로 인해 조슈번 군대는 막부와 사쓰마번 연합군에게 패한다. 구사카 겐즈이는 패배 후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이 정변이 바로 일본사에 유명한 '금문의 변'이다. 이 사건은 조슈의 존왕양이 파에게 치명적 타격을 입히며, 막부에게 '제1차 조슈  정벌'의 빌미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시모노세키조약

 조슈번이 곤경에 처한 지금, 영국과 미국, 네덜란드, 프랑스 4개국은 또다시 연합 함대를 이루어 9월 5일 시모노세키 전쟁을 도발했다. 조슈번의 애국 세력을 소탕하는 게 그들의 목표였다. 연합 함대는 삽시간 만에 조슈번의 모든 포대를 파괴해 버리고, 해협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3일 후, 조슈번은 항복을 외치며 4개국 연합 함대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한다. 일본은 그 조약 내용에 따라 외국 선박을 우대하며, 포대를 수리하지 않으며, 배상금으로 300만 달러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1866년 일본과 서양 열강 세력들은 개세약서를 체결하고 주요 상품에 대한 수입 세율을 5퍼센트로 낮추기로 했다. 이 조약으로 일본 경제는 더욱더 악화해 파탄 지경에 이른다.

 연합 함대가 조슈번에 공격을 가하는 상황에서도 막부는 조슈를 정벌하여 그 내분을 부추겼다. 조슈의 공순파가 급진파를 제압하고, 막부의 명령에 따라 금문의 변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던 가로들을 처벌하였으며, 야마구치의 신성을 파괴하고 조슈로 도망친 구게 5명의 신병을 인도받았다.

시모노세키 항구 사진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은 시모노세키의 현재 모습. 출처 : 위키백과


 조슈번의 실패로 다카스기 신사쿠의 관점에 근본적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4국 연합 함대가 조슈번을 공격하자,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보내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곧장 조슈로 돌아와선 다카스기 신사쿠에게 맹목적인 양이 정책을 중단하라고 설득했다. 승산 없는 전쟁은 해봐야 패하기만 할 뿐이며, 막부를 몰락시키고 조정이 대권을 잡아 통일을 꾀하는 동시에, 터무니없는 양이론을 배제하고 문호를 개방하지 않으면 국가의 장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때부터 기도 다카요시는 할거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조슈번도 막부 타도라는 목표를 확실하게 수립하면서, 우선으로 무장 할거 정책을 펼쳐 부국강병을 실현하는 데 주력했다.

 1865년 1월, 다카스기 신사쿠가 시모노세키에서 봉기를 일으켜 보수파의 진무군을 궤멸시켰다. 번주였던 모리는 다카스기 신사쿠에게 사람을 보내 힘을 합쳐 막부에 대항할 것을 제안했다. 이로써 도막 파(에도 막부를 무너뜨리려는 세력)가 조슈에 할거 정권을 수립해 전국적인 도막 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사쓰에이 전쟁 이후, 사쓰마번의 오쿠보 도시미치와 사이고 다카모리 정책에도 변화가 생겼다. 제1차 조슈 정벌이 끝난 후, 사쓰마번은 민심이 막부에 반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고 판단하여 조슈에 대한 정책을 변경했다. 오쿠보 도시미치와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쓰마번의 정책을 통제하면서, 동시에 무장 할거 정책을 펼쳐 도막과 개국을 찬성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해 천황을 정치적 수단으로 삼았다. 이로써 250여 년을 이어온 막부 통치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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