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2_일본의 개항전후 상황과 페리제독

by 티제이닷컴 2023. 12. 18.
728x90
반응형

 1600년대 일본 에도에는 막번 체제가 수립되었다. 교토와 나고야 사이에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전쟁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반대 세력 사이에 일어난 전투로, 도쿠가와는 동군, 반대 측을 서군이라 하여 '동서 전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전투에서 동군이 승리하게 돼 일본의 전국시대는 최종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며, 에도 막부가 형성되었다.


개항 전 일본의 상황

 일본에는 200여 개의 번과 다이묘가 있었는데, 도쿠가와파가 승리한 후 도쿠가와파 다이묘들은 모두 봉록을 하사 받았다. 반면, 반대파였던 도요토미 세력 쪽 다이묘들은 영지를 잃거나 심하게는 다이묘 신분을 박탈당하기도 하였다.

 260여년간 쇄국 체제가 시작됐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기독교로 인해 시작된 내전이었다. 외국 종교를 둘러싼 문제로 내전이 일어나자, 1640년 이후 도쿠가와막부는 내국인의 출국과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한 것이다. 중국만이 그 예외였다. 중국은 서양이 아니었고, 줄곧 중국과는 깊은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양 국가 중 유일하게 이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신교 국가였기 때문에 포교 자체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당시 일본에 개방된 유일한 항구는 나가사키였다. 바다를 메워 만든 '데지마'라는 섬이 있었는데, 네덜란드인들은 이곳에 격리된 채 생활했다. 반면 중국인들에겐 나가사키에서 거주할 수 있는 자유가 허용되었다. 이런 환경으로 나가사키는 자연스럽게 정보 공유의 장이 되었다.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들어오는 소식은 모두 이 나가사키를 통해 일본 국내로 전파되었으며, 네덜란드 무역 상선이 싣고 오는 신기한 물건들은 일본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다이묘를 비롯한 부유한 서민들이 네덜란드산 가구 같은 유럽의 물건들을 수집하곤 했다. 당시 유럽에선 자연 과학이 발달해 지구의, 망원경 같은 물품들이 일본으로 전해졌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 이전에 이미 국민 절반이 글을 읽을 수 있었다. 19세기 중엽 세계적으로 식자율이 50퍼센트가 넘는 나라는 영국밖에 없었다. 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았기에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근본적인 개혁을 빠르게 이루어나갔다. 대학에 의학, 공학, 물리학을 가르치는 학과가 처음 개설되고, 메이지 유신 초기 정부는 국립대학을 설립하고 소학교 의무 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아편전쟁이 일본에 미친 영향

 아편전쟁은 일본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청나라와 유럽의 첫 접촉은 무력 충돌이었다. 최신 무기와 현대화된 군대 앞에 청나라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초 영국에게 홍콩 지역을 빼앗기는 수모까지 겪게 된다.

 수천 년 동안 중국의 눈치를 보며, 모든 것을 배웠던 일본에게 중국은 곧 세상의 중심을 의미했었다. 그런 중국을 아편전쟁으로 서양이 압도적으로 짓밟은 것이다. 청나라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국력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항전을 선택했지만, 일본은 저항할 힘이 없다는걸, 하물며 미국 군함에 맞설 대포조차 없었기에 저항 없이 개항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압도적인 군사력 차이가 일본을 더 빠르게 개항하게 하여, 선진화된 무기, 기술 등을 더 빠르게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 이 상황이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는 절대 적지 않다.

 일본은 이미 세계엔 여러 나라가 있고 자신들은 그저 그 나라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했지만, 중화사상에 젖어있던 중국은 여전히 자신들의 나라와 다른 국가들을 대등하게 놓지 못했었다.

 개항이라는 비슷한 상황을 대하는 일본과 청나라의 차이는 극명했다. 일본은 미국이 강력한 힘을 갖게 된 원인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일본은 그 원인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습득하려 하였지만, 청나라는 오히려 자국의 문화에 더 집착하기 시작한다. 일례로 중국은 군함을 도입하더라도 군함 건조 기술을 배우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일본은 군함 건조 기술을 적극 도입하였다. 일본은 어떻게 하면 빨리 스스로 군함을 건조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고, 가장 먼저 한 일은 기술자를 초빙하는 일이었다. 군함을 만들기 위해 철이 필요했는데, 그 당시 일본은 목재만 사용할 줄 알았다. 제철 기술의 격차, 항해술의 격차 등등을 뼈저리게 느낀 일본은 해군을 중심으로 우수한 무사들을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 서양의 기술을 배우도록 장려하기도 했다.


 페리 제독

 미국 함대가 도착하기 전 일본은 이미 이 사실을 네덜란드 총독을 통해 알고 있었다. 막부는 사전에 어떤 준비라도 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미국을 상대할 만한 무기가 없었다. 페리 제독이 들어오기 전 막부는 인공섬을 쌓아 대포를 놓고 저항하려고도 했지만, 에도 만의 수심이 낮아 군함이 그곳까지 들어올 수는 없었다. 하물며 페리는 사전에 이미 이곳을 측량하기도 했다.

 온갖 가능성을 따져봤지만, 결국 저항해도 승산은 없었다. 막부는 항전을 포기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정했다. 막부도 처음에는 판단이 안 서서 다이묘들에게 의견을 구하였는데, 세상 물정 모르던 지방 귀족들은 무턱대고 강경책을 내놓았다. 그들이 국제 정세와 미국 군사력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일본을 개항시킨 미국의 페리제독. 출처 : 나무위키


개항에 대한 적극적 태도

 일본인은 개항을 좋은 일로 받아들였으며, 훗날 외국인을 배척하는 양이 운동을 펼치기는 했지만 외국에 대해서는 보통 적극적이었다. 이런 경향은 메이지 시대까지 이어졌다. 물론 당시 외국의 문물을 적극 도입하는 과정에서 일본도 유럽 열강들의 아시아 침략을 목격했으며, 이것까지도 모두 본받은 일본은 훗날 똑같이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했다. 이 점은 일본이 반드시 반성해야 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