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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49_두 개의 원자폭탄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

by 티제이닷컴 2024.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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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부터 일본은 일본 본도에서 쿠릴 열도, 오가사와라 제도, 이오지마, 마리아나 군도, 필리핀 군도,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및 인도양의 안다만 제도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방어선의 바깥쪽에는 라바울, 솔로몬 섬 중부, 뉴기니섬 중부와 마셜 제도가 있었다.


미국의 진격, 밀리는 일본

 일본은 중국군과 관동군, 조선군을 신속하게 태평양으로 파견했지만, 미국의 빠른 공격과 압도적인 자원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12월 말, 일본 해군은 솔로몬 군도에서 철수하였으며, 뉴기니에 있던 13만 일본군이 고립되었다. 일본은 마리아나 군도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1944년 6월, 미군의 대형 함대가 사이판으로 접근해 마리아나 군도에 있는 주요 일본 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일본은 항공모함 9척과 전투기 460대로 기동 부대를 새로 구성해 응전했다. 이 전투는 미국과 일본이 태평양에서 벌였던 결정적 전투였다.

 7월 7일, 일본은 사이판을 빼앗기고, 괌과 티니안섬을 잃고  태평양 전역에 대한 제공권과 제해권을 상실한다. 결국 일본 본토가 미국 공군의 폭격 범위 안에 들어가고 말았다. 미국은 전면 공세에 들어간 후 맥아더 장군의 지휘로 필리핀 레이테섬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다. 이후에는 전략적 메리트가 적은 섬들은 건너뛰며 직접 일본 본토의 섬을 공격했다. 이미 일본 해군과 공군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으므로 가미카제식 특공 전술에만 의존했다. 그러나 이 전술은 초반에만 당황하게 했을 뿐, 실질적 효과는 없었다.

 1945년 2월, 미군은 오가사와라 제도의 이오지마를 공격하고, 오키나와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몰락

 일본 육군은 중국에서 1호 작전을 개시함으로써 베이징에서 광저우까지 육상 통로를 뚫었다. 그러나 모든 지역에서 반격에 직면해 군비 소모가 많은 유격전을 실시했다. 이 때문에 1944년 한 해 동안 긴급 전비의 64퍼센트를 유격전에 쏟아부어야만 했다. 또한 미얀마도 순탄치 않았는데,  일본군은 미국, 영국, 중국의 3국 연합군으로부터 반격을 받았다.

 1945년 1월, 일본군은 최후의 작전을 개시했다. 허난성 서쪽, 허베이성 북쪽의 라오허커우와 후난성 즈장에 새로운 공격을 펼친 것이다. 산시를 공격해 쓰촨을 위협하기 위한 의도가 다분했다. 그러나 중국군은 저항했다. 결국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일본군은 진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후난성 즈장에는 중공군의 주요 기지가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은 최신 무기와 오랜 훈련으로 무장한 중공군의 강력한 공격에 맞서야 했다. 일본군은 장장 8년 동안 이어진 중일 전쟁의 마지막 대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결국 일본은 중국에 패하고 만다.

 미군은 오키나와까지 점령한 후, 일본을 폭격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기지를 확보했다. 미국 전투기가 일본 각 도서에 끊임없이 공습을 가했고, 각 항만에는 항공 어뢰를 퍼붓자, 일본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이때 일본에서는 소련과의 평화적인 협상을 통해 무조건 투항한다는 원칙으로 평화 협상을 실시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군부 강경파는 일본이 패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범 재판이 두려워 본토에서 결전을 벌여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두 개의 원자 폭탄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

 7월 26일, 미국, 영국, 중국 3개국이 일본에 무조건 투항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고, 미국 폭격기가 일본 공중에서 일본어로 작성된 수백만 장의 전단을 살포했다. 스즈키 일본 총리는 기자 간담회에서 "포츠담 선언을 발표한 것은 카이로 선언을 본뜬 구태의연한 수법이며, 이러한 행동은 위험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라고 3개국을 강하게 비난했다. 그리고 8월 6일, 미국은 결국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리틀보이'를 투하한다.

 히로시마에 원폭을 맞고도 일본은 투항하지 않았다. 한 소문에서는 히로시마 원자폭탄 보고를 받았지만, 원자폭탄 같은 무기가 전무했기 때문에 그 수치가 너무 터무니없어서 믿지 않았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렇게 8월 9일 오전 11시 30분, 이번엔 미국은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 '팻맨'을 투하했다. 이와 동시에 소련은 기계화 부대를 중국 동북부로 진격시켜 며칠 만에 일본 관동군을 완전히 궤멸시켰다.

 8월 10일 새벽, 일본 천황은 결단을 내렸다. 일본 정부는 스위스와 스웨덴에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인다는 소식을 미,영,중 3국에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8월 12일, 미, 영, 중에 소련까지 4개국이 "투항 순간부터 일본 천황과 일본 정부의 국가통치 권력은 동맹국 최고통수부의 명령에 따라야 하며, 일본 천황은 일본 정부와 제국 대본영(일본 천황 직무 최고통수부)이 투항 조약에 서명할 것을 보장하고, 일본 육해공군 전체에 전투 중단과 무장 해제 명령을 내려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8월 15일 정오, 수많은 일본인은 라디오에서 전해지는 낯설고도 기괴한 소리를 들었다.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고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가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에 그 공동 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일본의 일반 민중들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목소리였다. 바로 그들이 목숨 바쳐 수호하던 천황의 목소리였다. 그는 주변국을 잔인하게 짓밟으면서 일본인들의 영혼을 지배했다.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애매모호하게 포장된, 전쟁의 책임을 철저하게 희석한 이 조서와 기괴한 목소리의 옥음방송은 일본 신민들에게 청천벽력이었다. 전쟁에서 졌다는 걸 깨달은 국민들은 허탈감에 빠졌다. 이렇게 일본 군국주의 망상이 철저히 파괴되며, 세계를 뒤흔든 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리틀보이의 위력
리틀보이 투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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