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3세3 [프랑스]#3 백년전쟁 : 중세 기사의 몰락, 에드워드 3세의 승리 그리고 흑사병 중세 기사의 몰락 중세 시대 유럽을 종횡하던 기사는 왜 몰락하게 됐을까? 에드워드 3세의 천재적인 전쟁 능력 때문이었을까? 이에 대해 엥겔스가 한 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장궁은 대단히 위협적인 무기였다. 이는 영국군이 크레시, 푸아투, 아쟁쿠르 등의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엥겔스가 언급한 장궁은 사정거리가 거의 360미터에 달했고, 화살이 시위를 떠날 때의 속도는 초당 60미터 이상이었다. 250미터 밖에 있는 가죽이나 천만 아니라 80미터 이내에서 정면으로 공격할 경우에는 갑옷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50미터 내에서는 뚫지 못할 것이 없었다. 에드워드 1세의 종군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182년, 애버게이브니 성을 공격할 때 웨일스.. 2024. 12. 9. [프랑스]#2 백년전쟁 :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시작된 전쟁 백년전쟁 백년전쟁에서는 프랑스 모직물 공업 중심지였던 플랑드르 지역과 관련한 분쟁이 도화선이 되었다. 모직물 공업이 매우 발달한 플랑드르 지역은 정치적으로는 프랑스 국왕의 지배를 받았지만, 주요 원료는 영국으로부터 들여왔다. 따라서 영국 국왕 에드워드 3세는 플랑드르에 대해 경제적인 압력을 행사하여 이 지역으로의 양모 수출을 금지했다. 이로써 이미 온갖 모순이 교차해 있던 양국 관계는 이미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337년 5월 24일, 필리프 6세는 영국 관할지였던 기옌을 회수할 것을 선포했고, 영국은 당연히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 에드워드 3세는 스스로를 프랑스 국왕으로 칭하고,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를 공격했다. 이리하여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싸움이.. 2024. 12. 8. [프랑스]#1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시작된 전쟁 프랑스 왕위계승 - 백년전쟁의 서막 14세기 프랑스는 수도 파리를 포함하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매력으로 충만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외의 허약함도 지니고 있었다. 그 당시 전 유럽의 관심은 프랑스의 한 궁전에 쏠려 있었다. 그곳에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들이 호화로운 연회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은밀한 밀회를 즐기며 귀부인들과 노닥거리는가 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에서 격렬한 결투를 벌이기도 했다. 결투는 두 사람이 정해진 규칙에 따랐는데, 이것은 이전 시대 기사도 정신의 잔재였다. 당시 보헤이마 존 국왕은 파리를 '세계에서 기사도의 색채가 가장 강한 곳'이라고 칭송하며 계속 이곳에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나 1331년 파리를 방문한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에게는 전혀 낭만적이지 못한 곳이.. 2024. 12. 7.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