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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65

[러시아사]#39_알렉산드르 2세 암살과 레닌의 탄생 알렉산드르 2세 암살 농노를 해방한 알렉산드르 2세는 '해방 황제'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전제 군주였다. 농노를 해방한 것은 자신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의 진심은 독일 철혈재상인 비스마르크와의 대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황관은 내게 권력의 달콤함을 주었소. 이 황관을 잃는 것은 나의 국민과 민족의 재난을 의미하는 거요." 상황이 어느 정도 좋아졌다고 생각한 그는 더 이상의 개혁을 거부했다. 그는 막 싹트고 있는 악의 유혹에서 러시아인들을 보호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유혹이 언젠가는 사회의 재난을 몰고 올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내적으로는 한발 더 나아간 개혁을 원하는 이들을 최고 치안위원회를 통해 공격함으로써 유혈 진입했으며, 대외.. 2024. 2. 11.
[러시아사]#38_러시아 농노제 폐지, 경제 현대화에 이르다 농노제 폐지되다 차르 정부의 일부 인사들까지도 러시아가 너무도 오랫동안 농노제를 유지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이를 폐지하지 않으면 수십 년 후에는 러시아 전체가 무너질 수 있음을 조심스레 지적했다. 1861년, 마침내 러시아를 곪게 한 농노제가 끝을 맺었다.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제 폐지를 법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이제 러시아는 서유럽에 뒤처진 지 100년 만에 마침내 현대화로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농노들은 자유를 얻었고 지주들은 더 이상 농노들을 사고팔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토지는 여전히 지주들의 소유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실제 토지 가격의 2~3배가 넘는 배상금을 지불해야만 토지를 얻을 수 있었다. 해방된 농민들이 공장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거액의 배상금이 공업 발전 자금으로 사용되면서 수공업 공장.. 2024. 2. 10.
[러시아사]#37_농노제, 러시아 발전의 발목을 잡다 러시아의 발목을 잡는 농노제 유럽의 산업혁명으로 인해 러시아는 이내 영국, 프랑스 같은 국가에 뒤처지고 말았다. 러시아는 거대한 파도와도 같은 산업혁명에 직면해서도 수동적이고 느릿느릿한 태도를 보였다. 무엇보다 농노제는 러시아 산업화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한 크림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봉건 농노제의 패배를 상징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유럽에서의 모든 패권을 잃어버렸다. 러시아 역사상 가장 뼈아픈 패배였다. 고질병 같은 농노제는 점점 러시아의 활력을 빼앗아 갔다. 러시아의 정치계는 뇌물과 부패가 성행했고, 아무렇지 않게 국고에 손을 대는 이가 있는가 하면 벌건 대낮에 뇌물을 주고받는 이들도 있었다. 한 번은 니콜라이 1세가 군관을 시켜 당시 추진되던 공사의.. 2024. 2. 9.
[러시아사]#36_니콜라이 1세의 그릇된 야심과 낙후된 러시아 니콜라이 1세의 그릇된 야심과 낙후되는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의 계승자라 자처하던 니콜라이 1세(재위 1825~1855)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진압하며 자신의 강경 통치에 무척이나 만족했다. 유럽 사회에 변화의 기운이 감도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눈치채지 못했던 니콜라이 1세는 자신을 '유럽의 헌병'으로 칭했다. 엥겔스는 니콜라이 1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는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다. 그의 시야는 끝까지 일개 군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잔인함을 의지의 표현이라 착각했으며 독단적인 집정을 힘의 상징이라 믿었다." 1848년,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났고 이에 따라 제2공화정이 수립됐다. 니콜라이 1세는 마침 궁정 무도회에 참가했다가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 스스로 유럽의 헌병이라 여겼.. 2024. 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