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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포르투갈&스페인44

[스페인] 내부로는 이슬람, 외부로는 필리핀을 점령하다 '그라나다 사건' 이슬람 무어인, 반란을 일으키다. 1492년 그라나다가 수복된 후 가톨릭에 귀의한 이슬람교도들을 모리스 코스라고 불렀다. 특히 발렌시아가 지역에 거주하는 모리스 코스들은 전체 인구의 3분의 2에 달했고 발렌시아의 영토와 경제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라나다에서는 지금도 곳곳에 이슬람 문화가 남아 있다. 그러나 지배 세력인 가톨릭교도들은 이미 개종한 이슬람교도들에게도 매우 잔혹하게 굴었다. 마음대로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권력을 이용해 부녀자들을 희롱했다. 천주교 신부들까지도 이러한 악행을 일삼았는데, 한마을에서는 주민 전체가 그 지역 교구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주민들은 진상 조사위원들에게 "그놈을 이 지역에서 쫓아내 버려요! 그렇게 못하겠다면 그가 희롱한 여자들을 모두 아내로 맞아야 합니다... 2024. 5. 28.
[스페인] 펠리페 2세와 종교재판소의 마녀 사냥 펠리페 2세의 정치 1560년 펠리페 2세는 스페인 수도를 툴레토에서 마드리드로 천도했다. 그리고 마드리드에서 약 30마일 떨어진 깊은 산속에 엘에스코리알 궁전을 건설했다. 이것은 그가 생캉탱 전투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수도원 같은 궁전은 펠리페 2세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회색빛 화강암으로 기초를 다진 엘 에스코리알은 성벽, 궁전, 교회의 기능을 모두 갖춘 복합 건축물이다. 교회 내부는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지만, 외부는 엄숙하면서도 소박하고 보수적이다. 이것은 펠리페 2세의 음울한 성격과 중앙집권적 전제정치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펠리페 2세는 이곳에서 일상을 보내고 제국을 다스렸으며 죽음을 맞이했다. 펠리페 2세는 대단한 일벌레였다. 그는 국왕으로서 매우 검소하고 시.. 2024. 5. 27.
[스페인] 레판토 해전, 가톨릭vs이슬람 지중해 패권다툼 스페인 vs 오스만 제국, 지중해 패권을 장악하라 펠리페 2세의 앞길에 불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카를 5세가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전쟁을 치른 탓에 거의 모든 유럽 국가가 재정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유럽은 잠시 휴전 상태에 들어가고 스페인도 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또한 스페인의 지중해 맞수 오스만 튀르크 제국은 술레이만의 아들들이 왕위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이에 따라 스페인은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1560년대 초 오스만 튀르크 해군은 대규모 해전을 치르지 않았다. 1564년 펠리페 2세는 도리아를 해군 제독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서유럽의 모든 가톨릭 국가가 오스만 튀르크와 싸울 스페인 해군을 지원했다. 1560년대 중반 스페인 해군은 무적함대라는 명성에 손색이 없었으.. 2024. 5. 26.
[스페인] 펠리페 2세, 스페인 국왕이 되다 펠리페 2세(재위 1556-1598)의 제국은 카를 5세의 체계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러나 펠리페 2세 때부터 스페인풍 정치가 이루어졌고 황제 주변 측근도 모두 스페인인이었다. 펠리페 2세는 국왕으로서 매우 검소하고 시간을 준수하는 등 규범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일 처리에 빈틈이 없었기에 몰인정한 면모도 보였다.  국왕의 측근들은 스페인의 이익을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고, 스페인의 왕들은 대대로 펠리페 2세를 높이 칭송하고 존경했다. 그는 집권한 20여 년간 언제나 신중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정열적이고도 치밀한 성정 때문인지 그의 통치 기간 중 스페인 국력은 최고 절정에 이르렀다.펠리페 2세의 지중해 155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유스테 수도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의.. 2024. 5.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