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학/포르투갈&스페인44

[스페인]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루터, 신성로마제국을 뒤흔들다 카를 5세의 더 큰 문제는 독일의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되었다. 1517년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교회 문 앞에 '95개 조 의견서'를 붙였다. 이것은 마치 망치로 내려치듯 로마 가톨릭교도들의 마음을 두드렸다. '95개 조 의견서'는 몇 주 지나지 않아 전 독일로 퍼져 일련의 사건을 야기했다.마르틴 루터(1483~1546)하느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신임을 재발견했다. 이 결과 1517년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를 발표했는데, 이것이 큰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종교 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독일 및 로마 교회와 관련 있는 다른 나라의 기존 질서.. 2024. 5. 15.
[스페인] 카를 5세의 나폴리와 밀라노를 차지하기 위한 여정 교황과 로마 약탈 16세기 초까지 스페인이 바라보는 해양에 대한 시각은 분명했다. 아직 신대륙으로부터 금은이 끊임없이 들어오는 상황은 아니었기에 유럽 피권 쟁탈의 중심은 여전히 지중해에 있었다. 그러나 카를 5세에게 부여된 시대적 의무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는 왕의 자리에 오른 뒤 그 방대한 영토만큼 복잡하고 다양한 정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카를 5세가 가지고 있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라는 직함은 카를 대제 시절만큼 대단한 위력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그 영예로움은 변함없었다. 카를 5세는 독일에서 유럽과 관련된 모든 일에 주도적 역할을 해내야 했다. 당시 유럽의 강대국 구조를 보면 강력한 합스부르크 왕조가 출현해 오랫동안 유럽 대륙을 잠식하면서 매우 다양한 양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카를 5세의 .. 2024. 5. 14.
[스페인] 카를 5세; 스페인의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다 운명적으로 대권을 거머쥔 '카를 5세' 후아나의 첫째 아들 카를 5세에게는 유전인자가 곧 유산이었다. 1500년 그가 벨기에 헨트에서 태어나 세례를 받을 당시 도시 전체는 기쁨의 도가니였다. 그의 탄생은 훗날 그의 성대한 대관식 못지않은 축제였다. 이제 막 태어나 화려한 무늬로 수놓아진 비단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는 '룩셈부르크 공작'이란 직함을 얻었다. 수많은 기독교도, 시장, 황금 양모 기사단, 지방 영주들이 그를 추종했다. 이처럼 화려하고 웅장한 기세는 평생토록 그를 따라다니는 상징이 되었다.  카를 5세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의 합스부르크 왕국을 이어받았다. 그의 할아버지가 바로 독일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였기 때문이다. 또한 카를 5세는 스페인의 가톨릭 부부 왕의 외손자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스.. 2024. 5. 13.
[스페인] 이사벨 여왕의 뒤를 이은 '후아나'의 비극 1504년 무어인을 몰아내고 이베리아반도를 통일한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이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그녀의 딸 후아나가 카스티야의 왕위를 계승한다. 후아나는 사랑과 권력에 버림받은 비련의 주인공이다. 결국 그녀는 신성 로마 제국 출신의 남편 펠리페에게 왕위를 빼앗긴다. 얼마 후 펠리페는 열병에 걸려 죽고, 아들 카를 5세가 스페인 국왕 자리를 이어받는다. 이렇게 해서 카를 5세는 운명적으로 광대한 제국의 황제가 된다.비극적 삶을 살다 간 여왕 후아나 이사벨 여왕에서 그녀의 딸 후아나로 이어진 왕위 계승은 스페인이 유럽에서 지니는 위상이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게 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이사벨 여왕이 가톨릭 왕 페르난도와 결혼할 당시 그녀는 이미 카스티야, 레온, 갈리시아, 아스투리아스, 안달루시아, 무르시아, .. 2024. 5.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