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포르투갈&스페인44 [스페인]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영국과 제해권을 둔 대립 영국 왕실이 지원한 해적, 드레이크의 등장 스페인이 네덜란드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영국은 스페인의 봉쇄 조치로 네덜란드와의 무역에 타격을 입었다. 1572년 안트베르펜 이남의 하류길이 막히자 영국의 양모와 방직품 수출이 어려워졌다. 지브롤터 해협에서도 스페인 함대에 가로막히자 영국 상인들과 항해사들은 새로운 시장을 찾아야 했다. 바로 이때, 호킨스, 드레이크와 같은 영국 해군 역사상 유명한 명장이 등장했다. 호킨스는 1568년 3차 아메리카 탐험 도중 배가 파손되자 잠시 멕시코에 정박했다. 그러나 호킨스는 이곳에서 스페인 총독에게 습격받아 재물을 약탈당하고 많은 영국 선원이 죽임을 당했다. 호킨스는 이때부터 스페인에 원한을 품게 되었다. 몇 년 후 호킨스는 드레이크를 파견해 스페인의 카리브해 식민지를 습.. 2024. 6. 6. [스페인]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즉위와 펠리페 2세 영국 신교와 가톨릭의 대립 스페인의 광신적인 가톨릭 분위기는 대외정책, 종교정책을 비롯한 펠리페 2세의 모든 통치 전략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페인의 광신적 가톨릭은 1580년 이후 스페인 내부를 겨냥하기 시작했다. 펠리페 2세는 처음엔 신중한 통치 성향을 띠었으나 갈수록 이교도들을 심하게 핍박하면서 점점 더 잔인한 제국주의 색채가 짙어졌다. 편협하고 광적인 종교 성향을 가진 펠리페 2세는 이제 막 일어나는 신교 국가에 대해 매우 강력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1566년 스페인에서 풍요로운 영지 중 하나인 네덜란드가 가톨릭 스페인의 압제에 견디다 못해 반기를 들었다. 이것을 계기로 스페인은 네덜란드와 치열한 독립전쟁을 치르게 된다. 또한 이것은 종교적 갈등이 깊어져 가던 유럽의 신교 국가와 가톨릭 국가 간에.. 2024. 6. 5. [스페인, 포르투갈] 두 개의 나라, 하나의 왕국 스페인 펠리페 2세 vs 포르투갈 안토니오, 왕위 다툼 1579년에 열린 의회에서는 교회, 귀족, 평민 대표 10명이 모여 왕위 계승 문제를 협의했다. 그러나 이 의회에서 결론을 내기 전에 엔리케 국왕이 먼저 죽었다. 엔리케는 누구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5명의 총독이 모여 임시로 대리 통치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중 절반 이상이 이미 펠리페 2세에게 매수당한 상태였다. 이때 포르투갈과 스페인 국경 지역에서는 스페인 군대가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 국민들에게 무력으로 침입했다는 이미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의 바람과는 달리, 그의 경쟁자가 성급히 행동을 개시했기 때문에 펠리페 2세도 서둘러 군대를 움직였다. 클라투 수도원 원장 안토니오는.. 2024. 6. 4. [포르투갈] 포르투갈, 스페인에 합병되다 세바스티앙의 죽음과 포르투갈 국왕 자리의 공석 1576년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터키의 지원을 받은 무어인들이 모로코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세바스티앙은 오스만 튀르크가 북아프리카를 손에 넣으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라 생각했으며 이를 기독교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포르투갈은 모로코 쿠데타를 구실 삼아 대대적인 전쟁을 일으켰다. 1578년, 스물네 살의 젊은 국왕은 직접 군대를 모으고 지휘했다. 총 17만 대군이 아프리카로 향했다. 아프리카에 상륙했을 때, 한 경험 많은 노장이 해안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했으나 젊은 국왕은 이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세바스티앙은 주력 부대를 이끌고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가 알카세르키비르에서 모로코 군대와 격전을 치렀다. 결국 이 전투에서 포르투갈군.. 2024. 6. 3. 이전 1 2 3 4 5 ··· 1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