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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포르투갈&스페인

[스페인] 가톨릭 부부왕, 이베리아반도를 통일하다. 스페인 제국의 시작

by 티제이닷컴 2024.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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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 입성, 800년 만의 국토 수복

 역사의 그날 이른 아침, 스페인 이사벨 여왕은 그라나다 성 밖에 있는 네바다 산에 올랐다. 당시 유럽의 가톨릭 국가 여왕 중 가장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했던 그녀는 하루에 4번씩 목욕을 할 정도로 청결을 중요시했다. 그러한 그녀였지만 2년 전에는 그라나다 성 앞에서 "그라나다를 되찾기 전까지 절대 군복을 벗지 않겠다."라고 맹세했을 정도로 국토 수복에 대한 강한 의지와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1469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공주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자가 결혼했다. 3년 후 두 사람은 함께 스페인의 여왕과 국왕으로 등극해 그 유명한 가톨릭 부부 왕이 되었다. 두 사람은 무엇보다도 스페인의 통일이 급선무라고 여겼다. 8세기부터 당시까지는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반도를 점거하고 있었다. 이들 이슬람교도는 무어인이라 불렸다. 당시 이베리아반도는 무어인의 이슬람 세력과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 등 몇 개의 가톨릭 국가로 나뉘어 있었다. 중세 유럽에서 가톨릭과 이슬람의 종교 전쟁이 100여 년간 이어진 것처럼 이베리아반도에서도 가톨릭 국가 스페인이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국토 회복 및 통일 전쟁을 벌였다.

 1492년 1월 2일, 가톨릭 깃발 아래서 이사벨 여왕은 그라나다 왕국의 마지막 왕 보압딜에게서 왕궁 열쇠를 건네받았다. 이사벨 여왕은 그라나다의 대지에 입을 맞추고 페르난도 국왕과 함께 당당히 알함브라 궁전에 입성했다. 이렇게 8세기에 걸친 아라비아인의 스페인 통치는 막을 내렸다. 이날 전 유럽의 가톨릭교회에서 승리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국토 수복과 통일

 8세기까지 스페인에는 서고트라는 통일 국가가 존재했었다. 그러나 아라비아인들의 침입으로 이 왕국은 멸망했고, 그 후 스페인 왕국이 재건되기까지 800여 년 동안 국토 수복 전쟁이 이어졌다. 15세기 이베리아반도에는 카스티야, 아라곤, 그리고 무어인이 통치하는 그라나다 왕국이 있었다. 이 중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결혼으로 통일되었다. 그리고 15세기말 그라나다 왕국은 카스티야-아라곤 연합군에 패해 스페인에 흡수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베리아반도에는 훗날 스페인 제국으로 불리게 된 통일 국가가 수립될 수 있었다. 통일 후 스페인 제국은 아메리카로 뻗어나갔고, 그 시발점엔 바로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의 항해가 있었다.


대를 이은 거대한 제국

 이사벨 여왕은 스페인에서 진행된 모든 신대륙 발견 활동의 실질적인 후원인이었다.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통일, 그리고 뒤이은 그라나다 수복으로 온전한 통일 국가가 된 스페인은 이제 해외 영토 확장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스페인 부부 왕이 시작한 영토 확장 사업은 그들의 후계자에게 이어지면서 스페인은 세계 대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손자인 카를 5세는 친할아버지인 막시밀리안 1세에게 유럽 중앙의 신성로마제국까지 물려받아 거대한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한편 스페인은 계속해서 해외 영토 확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고, 그 결과 아메리카에서는 멕시코, 페루, 칠레를, 아시아에서는 필리핀, 괌 등을 손에 넣었다. 또한 해외 식민지 확장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라 지중해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도 힘을 다했다.

 스페인은 이사벨 여왕의 뜻을 이어받아 북아프리카의 알제리, 튀니지, 서사하라 지역을 손에 넣고 아라비아 세력을 견제했다. 또한 유럽의 강자인 프랑스와 경쟁하며 프랑스의 세력 확장을 견제했다.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넘보자, 이에 개입해 나폴리, 시칠리아, 밀라노를 얻는 성과도 있었다.

 후에 스페인을 물려받은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과 포르투갈의 아메리카, 아시아 식민지까지 손에 넣었다. 펠리페 2세 때는 스페인 제국의 영토가 신성로마제국의 20배에 달했다. 스페인은 이처럼 방대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항해술을 더욱 발달시켜야 했다. 당시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아시아 마닐라에 이르는 정규 항로에는 스페인 제국의 거의 모든 영토가 연결되어 있었다. 마닐라는 당시 유럽과 상하이, 마카오 간 무역 거점의 역할을 했다.

이사벨 1세 초상화
콜럼버스의 항해를 후원한 이사벨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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