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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포르투갈&스페인

[포르투갈] 대항해시대_엔리케 왕자, 대양으로 눈을 돌리다

by 티제이닷컴 2024.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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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케 왕자의 포르투갈 해양 탐험

 12세기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유럽 변방의 작은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은 유럽 최초의 단일민족국가였다. 당시 유럽 국가에는 '민족의식'이 존재하지 않거나 미미했지만 유독 포르투갈은 강한 민족의식을 보여줬다.

 14세기말 국경 분쟁에서 포르투갈은 예상과 달리 강대국 스페인을 격파했고, 이후 양국은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했다. 당시 포르투갈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을 물리친 주인공은 포르투갈 국왕인 주앙 1세였다. 훗날 그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의 누이와 결혼해 5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이 중 4명이 역사적인 인물로 성장했다. 특히 첫째 아들 두아르테는 포르투갈 왕위를 물려받았고, 셋째 아들 엔리케는 포르투갈 해양 패권 사업의 기초를 다져 항해 대발견의 시조가 되었다.

 1415년 포르투갈은 이슬람의 상업 중심지인 북서 아프리카의 세우타를 정복했다. 당시 선봉장이었던 19세 엔리케 왕자는 가장 먼저 세우타 요새에 입성해 직접 성벽 위에 포르투갈의 깃발을 꽂았다. 세우타 정복은 엔리케 왕자의 인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인생을 포기하고 과감한 모험에 인생을 건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아프리카와 대서양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투자했다.

 1418년 엔리케 왕자는 수도 리스본을 떠나 포르투갈 최남단에 위치한 사그레스에 거점을 세웠다. 그리스도 기사단장이었던 그는 기사단 재정으로 항해 학교를 설립했고, 천문대와 도서관도 세웠다. 또한 사그레스에서 동쪽으로 20킬로미터 떨어진 라고스에 항구와 조선소를 세웠다. 이후 사그레스는 포르투갈의 실질적인 항해 사업 본부가 되었다. 엔리케 왕자는 1460년 사그레스 앞바다의 거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40년간 이곳에 머물렀다.

 엔리케 왕자의 명성이 유럽에 퍼지면서 베니스와 제노바의 수많은 항해사가 포르투갈로 몰려와 사그레스 기지의 두뇌가 되었다. 엔리케 왕자의 항해 사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당시 유럽 최고 지도 제작자인 유대인 예후다 크레스케스다. 마요르카섬에 살다가 포르투갈로 이주해 온 크레스케스 덕에 엔리케 왕자는 첫 번째 목표는 포르투갈에서 멀지 않은 마데이라 제도와 아조레스 제도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그는 봉건제에 근거해 섬을 발견한 자에게 그 섬을 봉토로 나누어 주었다. 얼마 후 이곳에서 설탕과 술이 생산되기 시작했고, 이것은 포르투갈 왕실에 상당한 재정 수입을 안겨 주었다.


엔리케 왕자의 아프리카 개척

 그의 두 번째 목표는 아프리카의 보자도르곶을 개척하는 것이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항해사들 사이에는 대서양과 관련된 막연한 미신이 하나 퍼져 있었다. 보자도르곶 남쪽은 강한 태양열로 펄펄 끓는 '죽음의 녹색 바다'라는 것이었다. 1434년 질 이아네스 선장이 마침내 미신의 벽을 넘어 풍요로운 아프리카 땅을 발견하자 포르투갈은 온 나라가 기쁨으로 들썩였다. 이후 포르투갈에는 '항해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목숨을 아껴 무엇하겠는가?'라는 말이 유행했으며, 젊은이들은 항해와 모험이라는 가슴 벅찬 꿈을 꿈으로 들떠 있었다.

 1444년 엔리케 왕자는 함대를 파견해 본격적으로 아프리카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 탐험대는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데려왔고, 이때부터 노예무역이 항해의 중요한 목적이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쓸데없이 국가 재정을 낭비하고 있다는 그동안의 비난을 한순간에 찬사로 바꾸었다. 엔리케 왕자는 '왕실 아프리카회사'를 세워 아프리카 탐험 권리를 독점하였으며, 서아프리카 탐험 선박을 상대로 이익의 일정 부분을 세금으로 거두어들였다. 그는 총 4,000킬로미터에 달하는 서아프리카 해안선을 포르투갈 지도에 그려 넣었다.

 많은 사람이 엔리케 왕자의 항해가 종교적 동기에서 출발했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그의 항해는 그 종교적 동기와 무관하게 포르투갈이 당시 세계 상업의 중심 세력이었던 오스만 제국을 뒤로한 채 대양으로 눈을 돌리도록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그들만의 새로운 항로와 대륙을 발견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엔리케의 인품과 업적

 당시 역사 문헌 중 특히 페르난도 로페스가 남긴 자료를 보면 엔리케 왕자는 매우 신중하고 결단력 있는 인물이었으며, 자신의 목표를 분명히 인식하고 부하들이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최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훌륭한 리더였다. 그는 온화한 상관이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알았다. 예를 들어 그의 동생 페드로 왕자가 북아프리카에서 피살되었을 때, 주변의 조언을 받아들여 무력 충돌을 피하고 외교 루트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엔리케 왕자의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는 그가 설립한 항해 학교를 꼽는다. 물론, 그가 학교를 세운 목적은 오늘날의 대학처럼 학문을 연구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이 학교는 실제 경험을 전수하는 일종의 '전문 기술 전수학교'였다. 엔리케 왕자의 적극적인 지원과 격려 속에 이 항해 학교의 전문 기술 전수는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자신의 모든 재산을 포르투갈 항해 대발견을 위해 쏟아부었다는 사실 역시 그가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엔리케 왕자 초상화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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