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틀에 갇힌 지리적 한계를 넘어서다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유럽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동시에 이슬람 문명과도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덕분에 이들은 유럽 외에도 아프리카 북부 및 아시아에 이르는 무역 항로에 대한 정보를 일찍 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보는 포르투갈이 항해 대발견에 나서게 된 주요 요인이었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비유럽 문명, 특히 아라비아의 과학을 접하게 된 것이었다. 아라비아 과학은 특히 천문학과 수리학에서 유럽을 훨씬 앞지르고 있었다. 이러한 접촉과 교류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유럽을 벗어나 세계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유럽 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한 포르투갈은 유럽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일찍이 무역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신대륙 발견을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그저 단순히 다른 유럽 지역에서 온 사람들과 연해 무역을 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북유럽에서 지중해를 거쳐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지역이 이 연해 무역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해상 항로 개척은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아주 빨랐다. 지리적인 이점과 드넓은 바다를 오가며 무역을 해왔던 경험이 대항해에 대한 포부와 호기심으로 발전했다.
15세기말 스페인은 내적으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었다. 당시 스페인은 완전히 통일된 국가가 아니었으며, 세력이 크지는 않았지만 내부에 이슬람 세력도 존재했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이러한 문제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포르투갈은 독립 국가로 내부에 그 어떤 반국가 세력도 없는 평화로운 시대를 이어가고 있었다. 또한 아프리카, 북유럽과도 지속해서 우호적인 무역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유럽 내부로 진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바다로 진출하는 것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영토 확장 방법이었다.
우리도 동방의 향신료, 중국을 원한다
당시 유럽에서는 동방의 향료가 인기였으나 직접 구해올 방법이 없었다. 포르투갈의 여러 항구를 드나드는 상인들은 항해 생활에 익숙했고, 완벽한 항해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망망대해에서 선박의 위치를 측정하는 것쯤은 기본이었다.
항해 대발견으로 인해 그전까지의 해상 항로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이전의 해상 항로는 지중해에서 출발하여 육로로 이집트를 통과해 인도양에 도착하고, 다시 중국 남부 해안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항로는 주로 베니스, 이집트, 튀르크 상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포르투갈은 대서양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개척한 항로는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이 항로는 대서양을 경유하기 때문에 기존의 항로보다 훨씬 길었다. 또한 이 항로를 지나려면 반드시 해안선에서 멀리 떨어져야 했다. 중간에 큰 만을 끼고돌면 희망봉에 닿았고, 다시 마다가스카르섬을 지나면 동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는 매우 위험한 항로였다. 항로가 너무 길어 리스본에서 인도까지 가려면 대략 1년이 소요되었다. 또한 무모한 항해가 되지 않으려면 별자리를 정확히 관찰해 배의 위치를 측정해야 했다. 그러므로 수학 계산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따라서 항해 대발견으로 인해 기술, 항로의 길이, 해상 항로를 주관하는 국가 기관들은 모두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은 자신들만의 전용 항로를 개척해 수년간 독점적 권한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 항로는 여러 가지 위험 요소를 가지고 있었고, 또 항해 중 방향을 잃기도 쉬운 험난한 길이었다. 장점이라면 오직 둘, 포르투갈만이 독점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과 기존 항로에 비해 훨씬 넓다는 것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아시아, 중미까지
포르투갈은 말레이시아로 가기 위해 인도에서 중국해에 이르는 항로를 장악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항로가 바로 말라카 해협을 지나는 항로이다. 포르투갈은 말라카 해협을 장악한 후 요새를 건설해 중국으로 가는 길을 더 편리하게 만들었다. 포르투갈은 일찍이 중국해를 통해 여러 차례 중국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그들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지점이 바로 마카오였다.
마카오는 중국 황제가 포르투갈에 내준 작은 항구 도시이다. 해적으로부터 중국을 보호해 준 것에 대한 답례로 황제가 포르투갈인에게 땅을 빌려준 것이었다. 당시 포르투갈은 법에 따라 중국 황실에 일정량의 세금을 납부했다. 이 항로는 마카오에서 시작해 다시 일본까지 이어졌다. 1649년, 일본이 모든 항구를 폐쇄하기 전까지는 일본인들과 무역을 진행하기도 했다.
포르투갈이 개척한 항로는 스페인의 필리핀 항로, 멕시코 항로와 이어져 세계를 하나로 연결했다. 포르투갈은 일본, 마카오, 필리핀을, 스페인은 필리핀과 멕시코를 오가며 세계를 누볐다. 많은 화물이 멕시코를 통과해 카리브해로 운반되었고, 카리브해에서 다시 뱃길을 따라 포르투갈 알가르베 남부나 아조레스 군도를 경유해 세비야에 도착했다. 거의 지구 반바퀴를 도는 셈이었다.
이로써 포르투갈과 스페인 왕실이 하나가 되었던 펠리페 국왕 때 스페인은 태양이 지지 않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스페인 국왕은 멕시코에서 필리핀, 중국, 인도,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거의 전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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