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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포르투갈&스페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대항해시대 이전 상황

by 티제이닷컴 2024.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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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 식민지 분할의 선례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두 국가가 무력 충돌이 아닌 공동 협력으로 세계를 분할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이 조약을 통해 세계를 양분하고 각자의 영토 확장에 주력했는데, 이 조약은 두 나라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물론 양국의 군사 배치까지 명시하는 등 매우 상세한 부분까지 규정했다.

 특히 이 조약은 강대국의 식민지 분할에 대한 선례가 되었고, 이러한 세계 분할은 훗날 베를린 조약에서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베를린 조약은 유럽 열강이 한 자리에 모여 기존의 식민지는 물론, 미개척 영토까지 서로 나누어 가진 사건으로, 이때 오늘날 세계 지도의 초기 형태가 갖추어졌다. 서구 열강의 영토 확장은 이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고 교황

 1472년부터 1475년까지 포르투갈과 카스티야 왕국은 육지와 바다를 오가며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양국은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한 협약을 체결했는데, 카나리아 제도 남부 해상은 포르투갈 영역으로, 카나리아 제도 북부 해상은 카스티야 영역으로 정하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협약 체결 후, 1492년 콜럼버스가 앤틸리스 제도를 발견했다. 앤틸리스 제도는 양국 협약에서 정한 경계선 남쪽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포르투갈 국왕은 앤틸리스 제도가 포르투갈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국왕은 자신이 콜럼버스 항해를 지원했기 때문에 자기 영토라고 주장했다. 양국의 주장은 오랫동안 팽팽히 대립했다. 그리고 두 나라는 마침내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합의했다. 베르데 제도에서 서쪽으로 370 레구아 지점(처음엔 100 레구아 지점이었다가 포르투갈의 요구로 다시 370 레구아 지점으로 옮기게 되었다)에 선을 그었는데, 이는 콜럼버스가 발견한 카리브해 섬들의 귀속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는 카리브해 섬들이 카스티야의 영토임을 명확히 규정했다. 또 지구를 양분해 서쪽에서 발견한 영토는 스페인이, 동쪽에서 발견한 영토는 포르투갈이 소유하기로 했다. 후에 개척한 인도 항로는 포르투갈의 반쪽 지구에 해당한다. 이 조약 체결에는 당시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던 교황도 관여했다. 모든 가톨릭 국가 간의 문제 해결에 교황의 권력은 절대적이고 필수적이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그림입니다
스페인의 후원으로 아메리카를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유럽이 세상을 배운 방법 - 톨레미에서 마르코 폴로까지

 고대 그리스의 톨레미는 위대한 지리학자이자 지구 지리 및 우주 지리 연구에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지리학자들 대부분은 인간 생명과 사회 집단의 관점에 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지리학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었던 것이다.

 톨레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지구와 우주를 과학적으로 정의했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지구의 움직임에 대한 가설이 매우 다양했다. 지구의 모양은 평면, 일정하지 않은 형태의 고체, 혹은 원기둥이나 구체라는 등 다양한 견해가 있었다. 또한 이 시대에는 천체 간 거리 측정도 시도되었다. 톨레미가 쓴 '톨레미 지리서'는 당시 사회에서는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1406년이 되어서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서유럽 일대에서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특히 15세기말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유럽 전역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당시 출판된 '톨레미 지리서'에는 새롭게 발견한 신대륙 지도와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그러나 톨레미의 가설은 사실과 많이 달랐다. 그는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가는 항로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아프리카 대륙은 바다로 둘러싸인 것이 아니라 남극과 이어져 있고, 인도양은 바다가 아니라 거대한 호수라고 생각했었다. 톨레미가 살던 시대에는 원거리 이동에 제한이 많았기에 그의 이론에는 한계와 오류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훗날 포르투갈의 항해사들은 톨레미의 이론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했다. 포르투갈인들은 남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항해해 인도양에 닿음으로써 아프리카는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인도양은 호수가 아니라 바다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때부터 지구에 대한 연구는 가설에 그치지 않고 직접적인 관찰과 이해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포르투갈은 확실히 역사의 선구자였다. 포르투갈 사람들의 해양 진출은 톨레미의 이론에 근거했다기보다는 세상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호기심은 15세기에 최고조에 이르렀다. 당시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세계는 근거 없는 주관에 불과했기에 수많은 오류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동방의 일본이나 중국으로 가기 위해서 서쪽으로 가는 것이 유리하다는 이론이 유행이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은 바로 이 이론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외에도 많은 항해사, 탐험가들이 가져오는 새로운 소식도 유럽인들의 세계에 대한 생각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는 대부분 13세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소식을 유럽에 전한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모험가 '마르코 폴로'였다. 마르코 폴로는 자신이 직접 겪은 동방의 경험을 엮어 '동방견문록'을 출간했다. 이 책은 유럽인들에게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강한 지적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이에 수많은 탐험가들이 더 먼 곳으로 뻗어나갔고 이들이 가져온 새로운 정보는 유럽인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남쪽은 열대 기후인데, 당시 유럽인들은 이곳은 일 년 내내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기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었다. 그러나 이 것은 분명한 착오였다. 포르투갈은 이러한 착오와 진실의 재발견을 되풀이하며 역사의 한 장을 써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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