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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17

[스페인 마무리] 17세기, 유럽의 이류 국가가 된 스페인 17세기 유럽 스페인의 봉건 계급제도는 스페인 사회에 특별한 사회 풍조를 만들었다. 스페인의 많은 상인들은 큰돈을 번 후 앞다퉈 귀족 신분을 사들였다. 이를 위해 상인들은 권력자들에게 온갖 아부를 하며 돈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부자가 된 상인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투자했는데, 실상 상인의 자식들은 대부분 향락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사치 풍조는 스페인 사람들은 일하기 싫어하고 놀기 좋아하는 게으른 습관에 길들게 했다. 스페인은 오랫동안 네덜란드와 독립을 저지하는 전쟁을 치렀고, 영국과의 바다의 패권 다툼을 위한 전쟁도 끊이질 않았다. 영국은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30년 전쟁을 통해 스페인을 무너뜨렸다. 1648년 유럽 각국은 30년 전쟁의 막을 내리기 위해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했다. .. 2024. 6. 10.
[스페인] 스페인 제국의 몰락 스페인 제국의 몰락 아메리카로부터 유입된 은은 스페인에 사치성 소비를 조장했으며, 인도 무역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은 스페인으로 돌아온 후 세비야에서 관직을 사고 토지와 호화로운 주택을 사들였다. 이들은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 부동산과 토지에 투자해 아메리카 무역에 필요한 자금을 모아 카리브제도 사탕수수 사업과 진주 채취 사업 등에 투자했다. 당시 세비야에는 특히 은그릇 제조업이 발달해 은 수공업자의 지위가 약재상인과 대등할 정도였다. 스페인 내에 남겨진 은은 대부분 은기 제작에 이용되었다. 네덜란드의 스페인 부대 총사령관 알바 공작이 1582년 죽을 당시 그의 집에 은접시 600개와 은쟁반 800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스페인에서는 그가 청렴결백한 관리로 알려져 있었다. 1970년대 네덜란드.. 2024. 6. 9.
[스페인] 펠리페 2세의 죽음과 가난해지는 스페인 펠리페 2세 영면하다 펠리페 2세도 나이가 들자 궁전을 산책할 때 늘 그가 총애하던 에우헤니오에게 부축을 받아야 걸을 수 있었다. 펠리페 2세는 여전히 성실하고 엄격했지만 때때로 그를 괴롭히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오면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1596년 엘에스코리알 궁전에 매우 고통스러운 신음이 울려 퍼졌다. 늙은 왕 펠리페 2세의 병이 또다시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이럴 때면 그는 항상 궁전 안에 있는 가족묘로 가곤 했다. 대리석 조각상 아래 그의 아버지 카를 5세가 묻혀 있고, 그 옆에는 그의 어머니이자 포르투갈 공주인 이사벨이 잠들어 있었다. 또한 그의 세 부인도 이곳에 잠들어 있었으며 나머지 한 명인 메리 튜더는 이미 30년 전 런던에서 깊은 잠이 들었다. 펠리페 2세는.. 2024. 6. 8.
[스페인]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즉위와 펠리페 2세 영국 신교와 가톨릭의 대립 스페인의 광신적인 가톨릭 분위기는 대외정책, 종교정책을 비롯한 펠리페 2세의 모든 통치 전략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페인의 광신적 가톨릭은 1580년 이후 스페인 내부를 겨냥하기 시작했다. 펠리페 2세는 처음엔 신중한 통치 성향을 띠었으나 갈수록 이교도들을 심하게 핍박하면서 점점 더 잔인한 제국주의 색채가 짙어졌다. 편협하고 광적인 종교 성향을 가진 펠리페 2세는 이제 막 일어나는 신교 국가에 대해 매우 강력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1566년 스페인에서 풍요로운 영지 중 하나인 네덜란드가 가톨릭 스페인의 압제에 견디다 못해 반기를 들었다. 이것을 계기로 스페인은 네덜란드와 치열한 독립전쟁을 치르게 된다. 또한 이것은 종교적 갈등이 깊어져 가던 유럽의 신교 국가와 가톨릭 국가 간에.. 2024. 6.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