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240 [영국]#11_<마그나 카르타>의 이모저모(2) '마그나 카르타'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조치가 핵심적이다.첫째, 국왕이 국민에게서 돈을 얻어내는 통로를 차단한다. 즉, 국가가 함부로 돈을 징수하지 못하도록 제한 장치를 마련했다.둘째, 국왕의 판결은 공평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사법적 형평성을 주장했다.셋째, 지방 관리 및 제후 세력들의 압제를 없애고자 했다.'마그나 카르타'의 판본 '마그나 카르타'에는 총 4가지 판본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1215년에 작성된 문건으로 존 왕과의 타협을 통해 얻어낸 것이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존 왕은 이 협의를 무시하고 '마그나 카르타'의 무효를 주장하며 또다시 내란을 야기했다. 1216년 존 왕이 죽고 겨우 9세밖에 되지 않은 존 왕의 아들인 헨리 3세가 즉위한 뒤 새로운 '마그나 카르타'를 반포하게 된다. 그러고.. 2024. 6. 23. [영국]#10_존 왕의 죽음과 <마그나 카르타>의 이모저모(1) 존 왕의 최후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할 때만 해도 이를 충실히 이행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저 시간을 벌어보려는 속셈으로 타협에 응했다. 존 왕은 재빨리 교황의 지지를 얻어 '마그나 카르타'가 불법임을 선포했다. 그러고는 또다시 내란을 일으켰다. 존 왕은 이번에도 외국 용병을 고용하여 왕궁을 지켰지만, 민심을 잃어버린 왕에게 승산은 없었다. 1216년 5월, 반란 세력은 런던에 진입했고, 누구도 국왕 편에 서는 이가 없었다. 그해 10월 18일, 막다른 길에 몰린 존 왕은 결국 병사하고 말았다. 존 왕의 일생이 실패와 좌절로 점철되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마지막 생애 1년은 왕권을 지키기 위한 그의 신념이 승리했다고 볼 수 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존 왕은 결코 '마.. 2024. 6. 22. [영국]#9_영국 정치의 정체성을 확립한 <마그나 카르타> 마그나 카르타, 영국 정치의 정체성을 잡다 1215년 6월 15일, 템스강변의 러니미드 초원에서 존 왕과 귀족 대표 간에 담판이 벌어졌다. 그리고 여기에서 역사적으로 중대한 결과가 도출되었다. 존 왕이 국왕의 권력을 제한하고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는 문서에 조인한 것이다. 귀족들이 랭턴 대주교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이 문서에 대해 존 왕은 불만스럽기 그지없었지만, 결국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집행인 자격의 남작 25명과 함께 공동으로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 문서가 바로 우리에게 '대헌장'으로 알려진 '마그나 카르타'이다. 마그나 카르타 자체에는 새로운 요구사항은 없었다. 다만 윌리엄 1세 때부터 200여 년에 걸쳐 불문율로 내려온 국왕과 귀족들 간의 계약 관계를 명확하게 규정한 최초의 법률문서였.. 2024. 6. 21. [영국]#8_왕권이 하락되고 귀족의 권한이 향상된 과정 증세 또 증세 존 왕은 잉글랜드에서 차츰 군비를 확대하고 임의로 세수를 늘리는가 하면, 귀족들의 영지를 자기 재산처럼 마음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기존의 봉건적 규범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였다. 기록에 따르면, 존 왕은 이때 병역면제세를 16배, 귀족들의 영지상속세를 100배나 올리고 동산에 대한 세금은 배로 늘렸다고 한다. 그는 또 상업세를 신설해 모든 수출입 화물의 가치에 따라 그 15분의 1을 세금으로 물리기도 했다. 교회도 더 이상 성역은 아니었다. 존 왕은 교회에까지 손을 뻗쳐 1209~1211년의 3년 동안 교회 수입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이 2만 8,000파운드에 달했다. 소, 양, 보리의 값도 배 이상 껑충 뛰었다. 이것이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인플레이션일 것이다. 이렇듯 갈수록 .. 2024. 6. 20. 이전 1 ··· 12 13 14 15 16 17 18 ··· 6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