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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37_농노제, 러시아 발전의 발목을 잡다 러시아의 발목을 잡는 농노제 유럽의 산업혁명으로 인해 러시아는 이내 영국, 프랑스 같은 국가에 뒤처지고 말았다. 러시아는 거대한 파도와도 같은 산업혁명에 직면해서도 수동적이고 느릿느릿한 태도를 보였다. 무엇보다 농노제는 러시아 산업화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한 크림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봉건 농노제의 패배를 상징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유럽에서의 모든 패권을 잃어버렸다. 러시아 역사상 가장 뼈아픈 패배였다. 고질병 같은 농노제는 점점 러시아의 활력을 빼앗아 갔다. 러시아의 정치계는 뇌물과 부패가 성행했고, 아무렇지 않게 국고에 손을 대는 이가 있는가 하면 벌건 대낮에 뇌물을 주고받는 이들도 있었다. 한 번은 니콜라이 1세가 군관을 시켜 당시 추진되던 공사의.. 2024. 2. 9.
[러시아사]#36_니콜라이 1세의 그릇된 야심과 낙후된 러시아 니콜라이 1세의 그릇된 야심과 낙후되는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의 계승자라 자처하던 니콜라이 1세(재위 1825~1855)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진압하며 자신의 강경 통치에 무척이나 만족했다. 유럽 사회에 변화의 기운이 감도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눈치채지 못했던 니콜라이 1세는 자신을 '유럽의 헌병'으로 칭했다. 엥겔스는 니콜라이 1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는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다. 그의 시야는 끝까지 일개 군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잔인함을 의지의 표현이라 착각했으며 독단적인 집정을 힘의 상징이라 믿었다." 1848년,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났고 이에 따라 제2공화정이 수립됐다. 니콜라이 1세는 마침 궁정 무도회에 참가했다가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 스스로 유럽의 헌병이라 여겼.. 2024. 2. 8.
[러시아사]#35_데카브리스트 실패와 그후 러시아 지식인들의 긍지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뉜 데카브리스트 데카브리스트들은 서유럽 국가 문명에 완전히 부합하는 사회 제도를 실현하려 했다. 그들은 러시아가 매우 낙후되어 있으며 농노제와 군주제가 조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두 가지 방식의 혁명을 제안했다. 온건파는 계몽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서양 제도를 들여와 천천히 농노제와 군주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강경파는 더욱 강력한 방식을 원했다. 그들은 무장 쿠데타로 황제와 황족들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해야만 러시아에 공화국을 세우고 의회를 수립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당시 신하들로부터 데카브리스트들이 농노제를 폐지하고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알렉산드르.. 2024. 2. 6.
[러시아사]#34_데카브리스트와 관련된 몇몇 이야기(데카브리스트 광장과 로맨스) 데카브리스트 광장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유명한 광장이 있다. 참정원 광장이라 불렸던 이곳은 훗날 청동 기사 동상이 세워지면서 표트르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을 데카브리스트 광장이라 부른다. 바로 1825년 황제의 통치를 거부하고 농노 해방을 부르짖었던 데카브리스트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1825년 12월 14일, 데카브리스트 광장에서 울려 퍼졌던 총성과 포성, 그리고 말발굽 소리와 비명은 러시아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이곳에서 1,261명의 혁명 참가자들과 국민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 피가 러시아 땅을 적셨다. 1925년 데카브리스트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이곳을 데카브리스트 광장이라 부르고 있다. 시베리아에서 피어난 데카브리스트의 로맨스 여담 데카브리스트들의 운명은 그렇.. 2024. 2. 6.